▲1권 속그림. 주인공 '라이조'는 남학교에서 '치어리더부'를 만들어 멋지게 꾸려냅니다. 이때 처음으로 스스로 울타리를 한 꺼풀 벗어낼 수 있습니다.
대원씨아이
《게임방 소녀와 어머니》 같은 작품을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우리 깜냥껏 재미난 틀을 마련한다면 몹시 애틋하면서 맑은 웃음을 티없는 눈물과 함께 선물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린이가 3권으로 너무 짧게 끝내 버린 대목이 아쉽지만, 한국 만화밭으로는 3권까지 그린 대목이야말로 놀랍다 할 수 있어요. 권수가 늘어날수록 재미가 떨어져 이제는 더 안 보지만, 《알바고양이 유키뽕》 같은 일본 만화는 참 놀라웠습니다. 나라안에도 《납골당 모녀》를 그린 강현준 님이 《cat》을 그렸는데,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 꽤 많으면서도 이렇게 재미와 웃음이 톡톡 묻어나게끔 살뜰히 그리는 만화쟁이는 너무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이 굳었다고 할까요, 느끼는 가슴이 닫혔다고 할까요.
그렇다 하여 '착한' 만화를 그리는 분들은 바라보는 눈이 말랑말랑하고, 느끼는 가슴이 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착하게 그릴 줄만 알고 알맹이가 없는 만화도 많으니까요. 그린이 스스로 우리한테 할 말이 있는 가운데 착하게 엮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흐뭇하면서 즐거운 만화, 두 번 세 번 거듭 들여다보며 즐기는 만화가 된다고 봅니다.
《빈곤자매 이야기》라든지 《빈민의 식탁》 같은 작품이 이런 얼거리에 걸맞는 '착한' 만화입니다. 《여자의 식탁》도 돋보이는 착한 만화이며, 같은 이름으로 된 책이 많은데, 이와시게 타카시 님 《흐르는 강물처럼》도 눈여겨볼 작품입니다. 《내 마음속의 자전거》 또한 따뜻함과 넉넉함과 살가운 들을 듬뿍 담으며 우리한테 '야무진 알맹이에 책장 넘기는 재미'를 한껏 북돋우는 작품입니다. 자전거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내 마음속의 자전거》와 함께 《스피드 도둑》도 좋아하지만, 저는 《스피드 도둑》은 그리 내키지 않아요. 지나치게 '싸움을 붙이'고, '서로를 너무 미워한'다는 느낌이 짙으며, '더 세고 튼튼하고 커야'지 좋은 듯하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 '역시, 오타쿠틱해. 그래도 좋아. 그냥 좋아. 이유 없이 좋아.' .. (1권 83쪽)애장판으로 다시 나와도 널리 사랑받는 《아기와 나》 같은 작품 또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착한' 만화입니다. 《최종병기그녀》를 그린 다카하시 신 님 작품 《좋은 사람》은 책이름부터 '착한' 이야기를 담은 만화라고 보여주는데, 처음부터 '할 말'과 '보여줄 이야기'가 뻔히 드러났어도 기쁘게 읽었습니다.
우라사와 나오키 님 《야와라》도 얼핏설핏 느끼기로는 '착한' 쪽으로 흐를 듯했지만, 이 또한 《스피드 도둑》처럼 '더 크고 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루토》를 볼 때에도 기쁨이나 반가움보다다는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느낍니다(틀림없이 《플루토》를 아주 좋아할 분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또한 저는 그리 좋아하지 않고, 잘 그리지도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톰'에서 밑생각을 따오는 대목이야 그린이 자유입니다만, 테즈카 오사무 만화에서 '아톰'은 그냥 그런 '로봇'이 아니에요. 테즈카 오사무 만화에서 '아톰'을 비롯한 수많은 주인공에 어떤 마음과 넋이 담겼는가를 읽어내어야만, 또 느껴야만, 또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아톰을 따왔다'고 스스럼없이 밝힐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붓다》며 《불새》며 《뱀파이어》며 《노만》이며 《미크로이드 S》며 《아야코》며 《넘버 7》이며 《블랙잭》이며, 테즈카 오사무 님 만화에 남달리 스민 사랑과 믿음을 읽어내지 않고서 섣불리 '아톰'을 불러오는 일은, 우라사와 나오키 님은 당신 이름만으로도 사랑을 두루 받고 있지만, 스스로 어줍잖은 이름값을 좀더 높이려는 얕은 손길이라고 느낄 뿐입니다.
.. "상대팀 치어리더는 우리와 달리 전부 여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대. 우리 팀이 이기지 못하는 건 아마 그것뿐일 거야! 하지만 여장을 하면 틀림없이 그것도 문제없어! 적어도 관객을 웃기는 건 우릴 테니까!" .. (1권 116쪽)《아기공룡 둘리》뿐 아니라 《아리아리 동동》이라든지 《일곱 개의 숟가락》이라든지 《소금자 블루스》라든지 《볼라볼라》라든지 《꼬마 인디언 레미요》라든지 《쩔그렁쩔그렁 요요》라든지 《미스터 점보》라든지 《오달자의 봄》이라든지 《자투리반의 덧니들》이라든지 《홍실이》라든지 《1남3녀 막순이》라든지 《날자 고도리》 같은 작품에 한결같이 흐르는 구수한 사랑과 뜨거운 눈물이란,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느끼고 네 가슴속에 살아숨쉬는 하느님을 만나는 반가움입니다. 이러한 반가움이 없이 그리는 만화라면 겉보기로는 착해 보이는 만화이지만, 속살은 하나도 착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백성민 님 만화를 날카롭고 무섭다고도 하던데, 《장산곶매》와 《삐리》와 《장길산》과 《백범일지》 들에 흐르는 붓질은 더없이 반갑고 기쁜 봄비와 같습니다. 《노을》이나 《부자의 그림일기》를 비롯한 '한국현대문학 단편선' 같은 오세영 님 만화는 얼마나 따뜻하며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착한' 만화였던가요. 우리 삶터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잡아채는 손길만이 아니라, 우리 삶터 구석구석을 골고루 따스하게 보듬는 손길이기 때문에 이 같은 만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지난날 이희재 님이 《간판스타》와 《제비전》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그리던 손길도 이렇게 따뜻했고, 이상무 님이 그린 《포장마차》도 이와 같이 부드러웠습니다.
.. "남자를 좋아해?" "아니. 그건 아냐. 그래서 밤새 고민했는데, 아마 너니까 좋아하는 걸 거야. 넌?" .. (1권 192쪽)이런저런 까닭 때문에, 저로서는 요즈음 한국 만화를 그리 즐기지 못합니다. 그나마 《내 어머니 이야기》 같은 작품이 나오고, 《옥상에서 보는 풍경》 같은 작품도 나오며, 《꽃》과 《노근리 이야기》 같은 작품도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말 한 마디 넣지 않아도 가없는 사랑과 기쁨을 '착하게' 그려낸 에리히 오저 님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지, 아니 한국땅에 걸맞게 그려낼 누군가가 없을지 궁금합니다. 《아즈망가 대왕》이나 《요츠바랑!》처럼 꾸밈없이 우리 삶자락을 담아낼 만화를 아끼고 붙잡을 붓질은 언제쯤 이 나라에서 다시 꽃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길창덕 님처럼 단출한 붓질로, 윤승운 님처럼 시냇물 같은 붓질로, 또 김동화 님처럼 꽃잎사귀 같은 붓질로 착한 마음을 나누고파 하는 만화는 언제쯤 우리 삶터에서 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2) '오자와 마리'가 바라보는 삶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