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광리 금강소나무림 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520년의 할아버지 소나무. 50년 전만 해도 용소골, 소광리, 응봉산, 봉화군 일대에는 이런 나무들이 지천이었다.
녹색연합
잘려진 지 30~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나무 밑동의 선명한 톱질 자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일대의 숲이 겪었던 고단한 시기를 보여준다. 이미 말라버리고 썩어버린 나무 밑동만으로도 이 나무가 100년 가까이 되었을 아름드리 금강소나무였음을 추정하기에 충분하다. 금강소나무의 산판의 역사는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식민지의 울창한 원시림은 그들에게 너무나 탐나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울진, 봉화, 삼척지역의 산판은 일제강점기보다 더 맹렬했다. 이 땅에서 금강소나무의 원시림이 사라진 것을 두고 남 탓만 할 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가 일제와 전쟁, 산업화를 거쳤던 격동의 시기에 울진, 삼척, 봉화 일대에는 어마어마한 원시림이 벌목으로 사라졌다. 북쪽으로 삼척의 육백산 일대부터 가곡면의 덕풍계곡 응봉산을 거쳐 울진 북면과 서면 일대에서 산판이 벌어졌다. 용소골과 덕풍계곡으로 유명한 응봉산의 삼척 가곡면 골짜기 구석구석에는 레일을 깔았다. 탄광의 화차처럼 협궤보다 약간 작은 규모의 레일을 깔아서 동해안의 호산(삼척시 원덕읍)까지 직접 베어진 금강소나무를 반출하였다.
그나마 원형의 금강소나무림을 볼 수 있는 소광리 금강소나무림도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인 산판이 이루어졌다. 소광리 지역주민 박영웅(67)씨는 "자유당시절 정부는 개인업자들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받고 산림 벌채를 허가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산에서 자른 나무를 산 아래로 내려 보내기 위해 골짜기에 나무판으로 널찍한 미끄럼틀 같은 것을 만들었다"며 "금강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아래로 내려 보내고, 정부가 임대해준 미제 군용차에 실어 봉화군 소천면의 분천역으로 이송했다"고 했다. 당시 정부에게 금강소나무림은 거저 돈을 벌 수 있는 노다지와 같은 자원이었다.
후계림 조성사업의 우울한 단면을 목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