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학교는 문간에 전광판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광판에 새겨지는 말들이란...
최종규
그러면서 제가 중고등학교 때 해 본 저항을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반항이었지만, 한낱 맞대꾸하는 일(반항)만으로는 제 뜻을 교사와 학교한테 알릴 수 없을 뿐더러, 동무들한테도 제대로 나눌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가벼운 맞대꾸나 철없는 맞대꾸를 딛고 서서, 차분한 맞섬이나 올바른 거스르기를 해야 교사도 생각을 고치고 학교도 다른 매무새로 나오게 됨을 깨달았습니다.
1988년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아직 세상을 제대로 모르던 때였기에, 전두환이 얼마나 나쁜 놈인 줄 몰랐고, 그때까지 학교에서 한 주에 한 번씩 거두던 '평화의 댐 성금'이라든지 다달이 거두던 '방위성금'이 어디로 들어가는 돈이었는지를 비롯해 '독재'라는 말도 몰랐습니다. '쿠테타'를 알 턱이 없었을 뿐더러, 어느 교사도 우리한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새마을운동 체험 독후감'을 쓰는 숙제를 '더 얻어맞지 않으려고 쓸' 뿐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국민학교 6년을 마칠 때까지 쓰던 일기는 그냥 일기가 아니라 늘 '새마을일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레 머리를 빡빡이로 밀어야 하는 일은 제 마음에 깊이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왜 깎아야 하는데? 안 깎으면 깡패가 되나? 안 깎으면 공부를 안 하나? 깎으면 모두 천재라도 되나?
더구나 한 달에 한 번씩 가야 하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마다 거칠게 휘젓는 가위질과 마구 문지르는 머리감기는 고달플 뿐이었고, 머리 깎는 돈이 몹시 아까웠습니다. 늘 그렇지는 않았으나 국민학생 때에는 집에서 어머니가 머리를 깎아 주시곤 했는데, 중학생이 되건 고등학생이 되건,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집에서 스스로 깎도록 하면 될 노릇이고, 저마다 제 머리와 몸과 마음에 따라서 간수할 노릇이 아닌가 싶었기에, 이 마음을 곰곰이 다스려서 토요일 학급회의를 할 때에 늘 안건으로 올렸습니다. 받아 주든 안 받아 주든 '안건으로 올려야 할 까닭'을 예닐곱 가지나 열 몇 가지씩 쪽지에 적어 놓고는 읽었고, 우리 학교는 우리 인권을 너무 짓밟고 있으니 이러한 일들을 고쳐야 한다고 거듭 외쳤습니다.
.. 이제 중ㆍ고등학교에서 풍물 동아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한가하게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동아리를 만들어도 부모들이 반대해 동아리실이 폐쇄되기도 한다. 학생은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 학교가 생긴 지 1백 년이래요. 선생님들도 우리 학교 출신이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들이 자신들이 배운 교육 방식 그대로 우리를 가르친다는 점이에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예전 방식 그대로예요. 정말 심해요. 앞뒤가 꽉 막힌 선생님들이 많아서 친구들도 무척 힘들어 해요 … 제가 학교를 떠난 이유는 학교 안에만 있으면 많은 걸 놓칠 것 같아서였어요. 생각과 상상력이 고갈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학교라는 거대한 배가 흘러가는 방향대로 같이 흐르니까요 … 학교 안에서 상상하지 못하던 아이는 밖에 나와도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아이는 아예 상상할 수 없게 되어 불행해지는 거예요 .. (138, 144∼145쪽)나중에, 중고등학생 가운데 생각있는 학생이 모여 '대학생처럼 하는 학생운동 모임'이 있음을 알았는데, 이 모임에 있던 이들 가운데 우리 인권을 따진 동무들은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모임이 있다 했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책도 읽는다 했는데, 물위로 떠오르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반장을 뽑을 때 '전교 몇 등에 드는 테두리'에서 후보자를 고를 수 있던 일이라든지, 교사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질이 없어져야 한다는 외침 따위에는, 반 동무들이 뜻을 같이했어도 담임 교사는 언제나 '오늘 이 이야기는 이 교실에서만 있었던 걸로 한다'며 끝맺고는, 교감이나 교장한테 한 번도 보고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학급회의 주제는 대충 아무것이나 바꾸어 적고 토론한 줄거리도 대충 채워 넣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를 깨끗이 하자'라는 주제로, 청소를 잘하자라느니 쓰레기를 줍자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고 적습니다. '공부를 잘하자'라는 주제로, 다가오는 시험에서는 더 부지런히 공부하자라느니, 예습과 복습을 잘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느니 하면서.
.. "청소년 운동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나라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현재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공무원도 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어요. 또 원하기만 하면 군대도 갈 수 있고요. 그런데 유독 참정권만 없어요. 이건 좀 말이 안 돼요." .. (180쪽)중학교 세 해에 걸쳐 끝없이 싸우고 싸웠습니다. 맞으면서도 우리가 왜 맞아야 하느냐고 따졌고, 교사들이 잘못하면 우리가 교사를 때리면 되느냐고 따졌습니다. 소지품검사를 거스르고자 했으나 언제나 거스르지 못하게 되었고, 교과서 아닌 책을 빼앗아 갈 때면, 그 책이 무슨 불량불온도서라도 되는데 빼앗느냐고 따졌습니다. 자율학습이라면 자율로 하고픈 사람만 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보충수업은 보충해야 하는 아이들만 해야 하지 않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가지 달라지지 않았고, 어떤 한 가지도 나아지는 구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딱 한 번, '청소년 인권선언문'을 전지에 옮겨적어 한 주 동안 학교 문간에 세워 놓도록은 했는데, 한 주가 지난 다음에는 쓰레기통에 처박혔습니다.
교사들은 버젓이 동무들 뺨따귀를 올려붙이거나 코피가 터져도 주먹질을 그치지 않는 일을 교실에서도 해댔습니다. 이런 학교를 다녔다는 일은 '내 창피'라고 여겨, 중학교 졸업사진책은 안 사기로 했습니다. 졸업장도 안 받으려고 했으나 어머니 얼굴을 생각해서 받기로 했습니다. 기껏 하는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까요. 전교에 너 혼자만 졸업사진책을 안 산다니 말이 되느냐고 담임이 몇 번이나 달래고,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이 도장을 찍어 주십시오 하고 했어도 끝내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어처구니 학교를 다닌 일을 돌아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게 비싸게 팔아치우는 졸업사진책도 마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뒤, 연합고사를 마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중학생 때에도 1학년 때부터 아침 여덟 시 이십 분부터 0교시를 해서 밤 열 시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이어졌는데, 연합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0교시와 자율ㆍ보충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수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는 교과서 진도를 나가지 않았고, 수업 때에는 비디오를 틀어 주었고, 때로는 운동장에서 나가 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끼리 웃고 떠들고 찧고 노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수학 교사 한 사람이 "왜 이렇게 떠들어!" 하면서 우리보고 책상을 들고 벌을 서라 했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저도 얼결에 책상을 함께 들고 벌을 받았지만(저는 동무들하고 떠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맨 뒷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늘), 수학 교사가 비꼬듯 되뇌는 설교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더러, 네가 그동안 우리한테 한 짓이 있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십 분쯤 팔이 덜덜 떨리도록 책상을 들고 있다가, 이 수학 교사가 우리한테 한 시간 내내 책상을 들고 있으라고 하는 소리에 불뚝 성이 나서, 교단으로 책상을 냅다 집어던졌습니다. 동무들만 떠들었어도 나 또한 한 반 동무로 벌을 받기도 해야 할 테지만, 십 분 넘게는 벌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어차피 이 학교는 한두 달 뒤면 나하고도 인연이 끝인데, 너 같은 사람한테 입발린 설교는 듣기 싫으니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수학 교사 얼굴에 대고 책상을 던졌는데, 안타깝게도 수학 교사 얼굴은 살짝 스치고 칠판에 꽝 하고 박았습니다. 갑자기 날아온 책상에 놀란 수학 교사는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책상을 던진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저를 쳐다보고 무어라 한 마디를 더 했으면, 이번에는 걸상을 들고 뛰쳐나가 휘둘렀을는지 모르니까요.
수학 교사가 아무런 대꾸도 없고 시늉도 없기에 걸상에 털썩 주저앉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팔짱을 끼고 앉았습니다. 동무들보고 "야, 니들도 앉아. 저런 놈이 시키는 대로 할 게 뭐야?" 하고 말했는데, 다들 끽소리 없이 책상을 들고 있기만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