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자화상(Self-Portrait), Saint-Remy. September 1889. Oil on canvas. Musee d'Orsay, Paris, France
gogh
그의 화가의 길을 암시했던 화랑에 매력을 느꼈으며, 열성적이고 세심한 직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는 고흐가 날마다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웠던 시기입니다.
1872년부터 고흐 평생의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가 빈센트의 뒤를 따라 이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면서, 헤이그에서 보낸 고흐의 이 "네덜란드 시절"은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밝고 행복했던 시기입니다.
이 외에도 서점 직원, 전도사로서 인생의 다른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습니다. 고흐 그림 인생의 본격적인 수습기라고 할 수 있는 1880년, 그의 나이 27살이 되던 해 가을에 동생 테오가 후원한 돈으로 브뤼셀(Brussel)에 하숙을 정하고 본격적인 미술학원에 등록을 합니다. 이 때부터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림을 배웠고, 농민들의 삶을 가슴으로 그려냅니다.
파리에서 인상주의 영향을 받아 개성있는 화풍을 완성한 고흐위의 '자화상'과 아래 오늘 그림들의 '붓꽂 정물화'를 그렸던 시기 바로 전인, 1886년 2월 28일 새벽에는 파리에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시작하러 갑니다. 물론 고흐 삶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결심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파리의 지점에서 일하고 있던 테오를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서 만나 구내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미래를 설계합니다.
당시 파리는 새로운 '인상주의(impressionism)' 양식에 대한 논쟁이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곳에서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네덜란드, 1606~1669)를 비롯하여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밀레(Jean Francois Millet, 프랑스, 1814~1875), 그리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프랑스, 1796~1875)와 만나면서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의 그림 공부와 일본 목판화, 그리고 창작 활동은 고흐의 화풍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외로운 사랑에 실패한 고흐는 동생을 떠나 아를(Arles)로 이주하면서, 열정적인 작품 활동에 매진합니다. 지금까지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도 바뀌었습니다. 또한 그림의 색상도 다채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나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조하였습니다. 특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태양처럼 강렬한 색채, 보색 관계를 조화시켜 주제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을 생산하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표현주의(expressionism)적인 동시에 상징주의(symbolism)적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자연스럽고도 가장 본능적인(impulsive)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오늘의 아래 그림처럼, 자기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자연의 어떤 효과나 분위기를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그려나갔던 것입니다. 극심한 고독과 극빈한 삶에 지친 고흐는 현실을 살아갈 용기를 잃고 맙니다.
살레 목사의 보호 아래, 생레미(Saint-Rémy)에 있는 정신병자 수용소에 입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1년 반 동안 가장 정열적으로 작품 활동으로 가장 창조적인 작품을 남겼던 아를을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동향의 정원이 보이는 방에서 작업을 하였고,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고흐는, 이 입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의 순리와 숨결을 화폭에 창조합니다. 그 그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의 "붓꽃" 연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