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사가 내건 성탄 축하 펼침막. 12월이면 화계사는 어김 없이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는 펼침막을 걸어놓는다.
주재일
펼침막 하나 가지고 뭐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신대와 화계사의 오랜 인연을 알면, 그게 상당히 소중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3년 전 화계사는 연달아 세 번이나 불이 난 적이 있습니다. 모두 극성스러운 개신교인의 짓으로 알려졌습니다. 한신대 김경재 교수님과 학생 20여 명이 수업을 마치고 화계사를 찾아 흉물로 변한 법당을 둘러본 뒤 개신교인으로서 깊은 사죄의 뜻을 전하고 법당 청소를 도왔습니다.
기독교인의 방화에 분노하던 현각 스님을 비롯한 외국에서 온 스님들도 한신대 학생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 울분이 눈 녹듯이 녹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화계사 스님들은 한신대생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그해 12월 성탄 축하 펼침막을 거는 것으로 화답했습니다. 이듬해에는 한신대학원 학생회가 석가 탄신 축하 펼침막으로 응답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마을 개신교와 불교는 불미스러운 일을 극복하고 서로의 큰잔치를 축하하는 좋은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후 한신대는 화계사 행사 때 운동장을 내어주고 화계사는 한신대에 버스를 빌려주는 등,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화계사와 수유동성당, 송암교회가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바자회를 한신대 운동장에서 펼칩니다.
악연을 화해의 계기로동네 사람들이나 등산객 등도 이들의 행동에 "종교들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들이 친하게 지내는 게 불편했나 봅니다.
한신대 학생들이 걸어놓은 석가 탄신 축하 펼침막을 누군가 밤에 찢어놓으면, 다음날 학생들이 새로 만들어 걸어놓기를 반복했습니다. 조금 더 극성스런 개신교인들이 한신대로 항의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신학교 학생들이 마귀의 괴수를 찬양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걸어놓을 수 있느냐, 학교는 그걸 말리지 않고 왜 내버려두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김경재 교수는 "몇 년 동안 집으로 걸려오는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반대가 예전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한신대 대문을 지키는 경비 아저씨는 "아직도 항의전화가 걸려오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줄었다"고 말합니다. 1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화계사와 한신대가 서로에게 보시하며 꾸준하게 신뢰를 쌓아온 덕에 주변도 조금씩 변화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져 안타까움이 더욱 컸습니다.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에 맞서 한신대 학생회는 보수적인 신앙인들의 무례한 행동을 규탄하기보다는 묵묵하게 다시 펼침막을 제작해 달아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