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전국유족회장 노현섭씨(왼쪽), 2009년 4월 25일 마산유족회 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된 조카 노치수씨.
김주완
그로 말하자면 노동운동에서 '마산의 바웬사' 같은 인물이었고, 일찌기 혁신정당 운동을 벌인 진보정치인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 만행을 가장 먼저 폭로하고 전국적인 진상규명 운동을 이끈 인권운동가였다.
마산의 노동·인권운동가 노현섭씨를 아시나요?노현섭(1920~1992) 씨는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현 마산상고)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와 함께 그는 마산자유연맹 위원장과 전국자유연맹 위원장으로 한국 노동운동을 주도했으며, 노동자 자녀를 위한 마산고등공민학교와 노동병원을 설립·운영하기도 했던 마산노동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6·25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친형 노상도씨를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었으며, 자신도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중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려 필사의 탈출을 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전국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의 첫 기록은 바로 노현섭씨의 일기장에서 찾을 수 있다.
"60년 5월 24일(화) 구름, 맑음. 상오 11시부터 하오 1시까지 '정부는 6·25 당시의 보련(保聯)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김용국 군과 단 둘이서 침묵의 시위를 온 시내로 하였다. 1600명의 행방불명자의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그날의 침묵시위와 함께 노현섭씨는 다음과 같은 대자보를 시내 곳곳에 써 붙이고 유족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6·25사변 당시 보도연맹 관계자로서 행방불명된 자의 행방과 그의 진상을 알고 관계당국에 진정코저 하오니 유가족께옵서는 좌기에 의하여 연락하여 주시옵기 자이경망하나이다. 임시연락사무소 마산시 중앙동 1가 1번지(마산자유노조사무실내)…노현섭 근고."6월 12일 마산상공회의소 회의실에는 소복을 입은 여인네들과 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6·25 때 남편이나 아들·형제를 보도연맹사건으로 잃은 후 제삿날은 물론 생사여부도 모르고 지내온 유가족들이었다. 이날 노현섭씨의 일기는 "장내는 울음의 바다였다"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