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김영옥씨가 매물을 정리하고 있다. 서울시가 소유권을 가진 김씨의 가게는 작년 5월31일 계약이 종료됐고, 양자는 명도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손병관
"작년 3월19일 7평짜리 가게를 3억 원 주고 계약했는데, 서울시는 (같은 해) 5월 31일이 계약 만료일이었다며 1년째 나가라고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하는 김영옥씨는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가게를 얻기 위해 지난해 1억5천만 원의 은행대출을 받아서 다달이 80만 원씩 갚고있다. 하루 12시간씩 가게를 꾸려가는 것도 버거운데 요즘은 자주 피켓을 들고 서울광장과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으로 나가야 한다. 당장 22일과 29일(서울시청 앞), 내달 7일 한나라당사 앞에 상인들의 집단시위가 예정되어 있다.
법대로라면 김씨는 서울시로부터 보증금 2300만 원만 받고 가게를 넘겨줘야 한다. 김씨가 기존 상인과 계약할 때 지불한 권리금은 법률적 효력이 없다. 김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상인들은 부지기수다.
서울시가 소유권을 가진 시내 지하상가에는 대략 3000개의 점포들이 있는데, 서울시는 이 가운데 강남역·고속버스터미널·영등포 등 5개 상가 900여 개 점포를 민간업체에 위탁 운영할 방침이다.
서울시가 이번 주중에 입찰공고를 내면 다음 달까지 업체 선정을 마무리하고, 하반기부터는 이 업체가 강남권 상가들의 리모델링을 맡게 된다. 상가 리모델링 과정에서 기존 상인들은 민간업체와 새로운 조건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 어느 업체가 맡더라도 그동안의 관행이었던 권리금을 인정하지 않고 보증금을 크게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최근까지 4억~5억 원의 권리금과 함께 가게를 주고받았던 상인들이 무더기로 낭패를 보는 셈이다. 강남역 지하상가(212곳)에만 지난 5년 사이에 점포를 새로 인수한 사람이 1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 지하도상가의 역사는 19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 구간)이 처음 개통된 것이 1974년 8월이었으니 지하도가 지하철보다 먼저 생겼다.
서울시는 전쟁이 발발하면 시민들의 방공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곳 저곳에 지하도를 만들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재정형편이 넉넉지 못해 20년 뒤 기부채납하는 방식으로 민간자본을 유치했다.
이명박 시장, 2002년 '계약 연장'으로 미봉책... 오세훈 시장에 '불똥'지하도 시공업체들은 업체들대로 상인들의 분양 보조금을 미리 걷어 공사대금을 충당했고, 이 때문에 민간업체들이 상가를 관리하는 동안에는 상인들끼리 권리금을 주고받는 행위가 묵인됐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 지하도상가의 관리권이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으로 넘어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서울시가 2002년 11월4일 "지하도 상가 점포의 양도·양수를 전면 금지하고 일반경쟁 입찰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상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지하도 상가 곳곳에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을 규탄하는 대자보와 플래카드가 나붙었고,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 대통령은 이듬해 보증금을 100% 인상하고 임대차계약을 5년 연장하는 것으로 상인들과의 갈등을 봉합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대권 도전을 일찌감치 생각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합의는 5년 뒤에 취임할 차기 시장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서울을 새롭게 디자인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오세훈 시장은 서울의 노후한 상가들에 어떻게든 손을 대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다. 지하도 상인들의 반발에 아랑곳없이 서울시가 위탁 운영 절차를 서두르는 것도 오 시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관계자는 "왜 지금의 상인들이 인근지역에 비해 훨씬 저렴한 보증금을 서울시에 내면서도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권리금을 핑계로 노른자위 상권을 독점하려고 하나? 다른 시민들도 그곳에서 장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