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판에 물을 대는 경운기. 농부가 할 일을 경운기가 대신해주고 있는데요. “하루 종일 걸어가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뭐지?”라는 수수께끼가 생각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조종안
24절기에서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穀雨)는 청명과 입하의 가운데이며, 양력 4월20일경(음력 3월 중)에 들고, 봄비가 내려 백곡(百穀)이 윤택해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도 나흘 전에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비가 내리더니 곡우 날에도 상당량의 비가 내렸습니다.
예로부터 곡우 무렵이면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내리고 그 물로 못자리를 했지요. 물이 꼭 필요한 곡우 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곡식에 꼭 필요한 비가 내리는 곡우에 못자리하기 때문에 곡우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였고, 따라서 나라에서는 백성에게 볍씨를 내어주며 못자리를 권장하고 파종이 있는 날에는 죄인들도 잡아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지리산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곡우에 약수제를 지내왔고, 조정에서 파견된 제관이 지리산 신령에게 다례차를 올리며 태평성대와 그해 풍년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때쯤부터 조기잡이가 시작되어 서해안 한구마다 북적거렸는데요. 흑산도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떼가 북상하여 충청도 격렬비열도 근처까지 올라와 풍어를 이루었는데 이때를 '곡우사리'라고 했고, 연평도까지 올라가는 5월 조기어장을 '입하사리'라고 했습니다.
곡우 무렵은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여서 깊은 산으로 '곡우물'을 마시러 가는 풍속이 내려오는데 자작나무나 박달나무 등에 통을 매달아 구멍을 내어 수액을 받아 마셨습니다. 특히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수액일수록 미네랄 성분이 우수하고 당도가 더 높다더군요.
경칩의 고로쇠 물은 여자 물이라 해서 남자에게 좋고, 곡우 물은 남자 물이라 해서 여자들에게 더 좋다고 하는데요. 특히 수액이 많은 자작나무는 지리산 아래 구례 등지에서 많이 나며 그곳에서는 곡우 때가 되면 전통을 따라 약수제까지 지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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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물'과 '고구물'의 추억마흔아홉 살 되던 해에 사경을 헤매다 극적으로 생명을 구하신 어머니는 의사가 알려준 음식조절을 철저히 하며 건강관리를 했는데요. 해마다 곡우(穀雨)를 전후해서 집을 2-3일씩 비웠습니다. 진안·장수로 '곡우물'을 마시러 다녔거든요.
초등학교 6학년 시절로 기억합니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막내 누님이 부엌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는데요.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막내 누님이 "어머니가 주조장 아줌니랑 '고구물' 마시러 감서 반찬 사먹으라고 돈을 주고 갔다"라고 하더군요.
누님 얘기는 며칠 동안은 어른들 눈을 의식하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마음껏 뛰놀 수 있다는 해방감 외에는 놀랄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고구물'이란 게 도대체 얼마나 좋으면 첩첩산중이라는 진안·장수까지 마시러 가는지 어린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곡우라는 절기를 모르던 시절이었고 평소 무엇을 보면 궁금한 게 풀려야 시원했던 성격이라서 더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귀찮다는 듯 "몸에 좋은 '고구물'이 마시러 가지 머더라 가!"라는 답변뿐이었고,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여쭤도 모르신다고 해서 궁금증은 더해갔습니다.
'고구물'의 궁금증은 풀기 어려운 숙제였는데요. 어머니가 부잣집 아주머니들하고만 마시러 다니는 것을 보고 "아하, 부자들만 마시는 '고급물'을 '고구물'이라고 잘못 얘기허는 개비다"라며 제 생각이 맞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고구물'이라고 하니까 담임선생님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옵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도 그 얘기를 하며 웃었고, 지금도 막내 누님을 만나면 '고구물' 얘기를 하면서 웃곤 하지요.
'곡우물'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흥부가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데요. 동생이 부자 됐다는 소문을 듣고 심술보가 뒤틀린 놀부가 달려가 온갖 수작을 부려 얻은 '화초장'을 등에 지고 오면서 다리를 건너다 이름을 잊어버려 '초장화', '장화초', '고추장', '된장' 이라고 되뇌던 대목이 떠올라 더욱 웃음이 나옵니다.
곡우에 맞춰 단비가 내린 틈을 놓치지 않고 논으로 나서는 농민들을 보면서 마음을 추슬러봅니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묵묵히 일을 하다 보면 꽃피고 열매 맺는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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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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