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나라 얼굴에 먹칠... 뒤통수 맞은 기분"

[현장에서] 국회 상춘객들 "제발 싸움 좀 하지마!"

등록 2009.04.08 21:33수정 2009.04.0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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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벚꽃축제 기간을 맞아 8일 국회를 찾은 상춘객들이 경내를 둘러보며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
여의도 벚꽃축제 기간을 맞아 8일 국회를 찾은 상춘객들이 경내를 둘러보며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남소연

봄을 맞은 국회가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4월 6일 윤중로 일대에서 시작된 여의도 벚꽃축제 덕분이다. 10만 평에 달하는 국회의사당은 소풍 나온 시민들로 연일 북적인다. 화창한 날씨까지 이어지면서 국회 잔디정원과 의원동산에는 평일에도 삼삼오오 돗자리를 깔고 앉은 상춘객들로 빼곡하다.

하지만 정치권 사정은 다르다. 입법부 최고 수장 두 사람(박관용, 김원기)은 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대검찰청에 불려갔다. 전직 대통령은 "부인이 돈을 받았노라"며 사과문까지 올렸다. '박연차 광풍'에 벌벌 떠는 국회는 국회의원들은 말 그대로 겨울이다. 국회 건물 밖의 봄과 국회 건물 안의 겨울. 상춘객들은 한 공간 속 두 계절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뇌물은 정치인들 일과 아니냐?"

"답답하기 한이 없지 뭐. 오늘도 국회 (대정부질문) 보다가 나왔는데 '역시 싸우기는 마찬가지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야당은 이명박 대통령 험담하고, 여당은 또 반박하고."

8일 오후 국회의사당 내 의원동산에서 만난 70대 노부부는 한숨부터 내뱉었다. 노부부의 눈에 비친 국회는 여야가 정쟁을 벌이는 싸움터일 뿐이었다. "국회의사당을 TV로만 보다가 직접 보니 감개무량하다"는 감탄도 나왔지만 '박연차 뇌물'에 대해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나이를 74세라고 밝힌 할머니는 "뇌물 받은 것은 다 내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옆에 섰던 할아버지는 "(뇌물은) 정치인들 일과 아니냐"고 별 기대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네 살 난 딸과 국회를 찾은 젊은 부부도 부정적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임영민(35)-황은경(35)씨는 "국회를 보면서 의원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남편 임씨는 "사실 (18대 국회의원도) 뽑을 사람이 없어서 뽑은 거지, 일 잘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택한 건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정치권이 싸우더라도 국민이 납득하는 주제와 방법으로 싸웠으면 좋겠다"며 "정책 논쟁이 아닌 감정싸움이 돼선 안 된다"고 쓴소리를 했다. 인터넷 등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창구가 많은데도 국회가 민의를 외면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임씨는 "하도 많이 싸우니까 정치에 관심이 없어진다"고 고개를 저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임씨는 "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며 "기대를 갖고 뽑은 사람조차 그렇다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영등포에서 벚꽃 구경을 나온 김아무개(57)씨 부부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남편 김씨는 "부인이 받았다고 해도 바로 돌려주든가 하는 조치를 취해야지, 빚 갚는 데 썼다고 묵인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열을 올렸다. 그는 "인터넷 사과문으로 끝나선 안 된다"며 "노 전 대통령을 믿었는데, 돈 앞에선 다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정치권 어른들의 비리는 어린 동심에도 나쁜 인상을 남긴 듯했다. 이날 점심때, 국회 잔디광장은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떠들썩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국회를 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웅장하다", "잘 만들었다"는 저마다 대답이 돌아왔다. 친구들과 화단에 앉아 있던 이상호(12)군은 "국회의원들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얼굴을 찡그리며 "뇌물 때문에 창피하다"고 말했다.

초등학생도 "뇌물 때문에 창피하다"

 여의도 벚꽃축제 기간을 맞아 8일 국회를 찾은 상춘객들이 경내를 둘러보며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
여의도 벚꽃축제 기간을 맞아 8일 국회를 찾은 상춘객들이 경내를 둘러보며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남소연
이날 만난 국회 상춘객들에게 확인한 정치감정은 '냉소'였다. "정치인들이 원래 그렇다"는 기대감 없는 답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상생 정치'를 해달라는 주문도 많았다.

의원동산 한 켠에서 만두와 족발을 놓고 봄꽃을 즐기던 윤재성(75·서울 목동), 송재림(73·서울 장위동)씨는 "젊은 사람들이 서로 양보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북서는 로켓도 쏘고 하는데 국회가 정신 차려야 한다"는 불만도 털어놨지만 "지금부터 잘하면 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뇌물스캔들'에 대해 "서로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윤씨는 "우리가 정치인 악담도 많이 하지만, 뇌물이 관행이었던 시절도 있지 않았냐"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사과문도 봤다는 그는 "예우 차원에서라도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된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느냐"는 의견을 내놨다.

직장 동료 2명과 윤중로를 찾았다는 박종만(54·서울 아현동)씨도 비슷한 생각을 밝혔다. 박씨는 "원래 고기가 썩으면 파리떼가 많이 달라붙는 법 아니냐"고 비유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해 "페루도 후지모리 전 대통령을 30년, 40년형으로 처벌한다고 해서 국가 망신을 자초하고 있는 것 같다"며 "우리나라도 국가적 망신을 당하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박씨와 동료들에게 "현재 국회의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100점 만점에 50점이 안 된다"는 대답이 나왔다. 한병근(54·인천 부평)씨는 "정치권이 서로 헐뜯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라며 "이쪽과 저쪽이 서로 존경해 상생 국회를 만들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말했다.

윤중로를 중심으로 한 여의도 벚꽃축제는 오는 18일까지 열린다. 그 기간 중 이틀(11~12일) 동안 국회는 자체 벚꽃축제인 '여민락 한마당' 행사를 열어 국회 본회의장 관람 등 본관까지 모두 개방한다. 여기서는 한국형 오페라인 여성국극 '춘향전'과 궁중검무인 '진주검무' 등 전통문화예술 공연, '세계문화 민속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 이틀 동안 국회는 1년 중 가장 인기있는 소풍장과 데이트 코스로 거듭난다. 지난해 '여민락 한마당'은 모두 100만 명의 시민이 다녀갔다.

하지만 늘어진 벚꽃과 목련 등 봄꽃이 지고 나면 국민들의 발길도 다시 뜸해진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현직 국회의원들은 벚꽃보다 인기가 없는 셈이다. 왜 그럴까. 남편·딸과 함께 국회를 찾은 황은경씨의 말 속에 해답이 있을 법도 하다.

"국민이 본받고 싶은 리더가 있었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리더가 없으니, 지금 각 당도 흔들리는 것 아니겠느냐."
#국회 #박연차 리스트 #벚꽃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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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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