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재 입구 비석남성재 입구로 옮겨진 비석들
김환대
이곳은 영일 정씨의 시조 형양공 정습명을 제사 지내기 위해 무덤 아래에 세운 재실이다. 정습명 선생은 형양 선생이라 하며, 고려의 명신으로 일찍 항공문과에 급제하여 예종, 인종, 의종 등을 보필하였으며 관직은 한림학사와 추밀원지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높은 학식으로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홍주 소대현(충남 태안군)에 운하를 파기도 하였고 이어서 시폐 십조목을 상주하여 문란하던 정국을 바로 잡으니 인종의 더욱 두터운 신임으로 태자 사부를 겸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병으로 한동안 휴양 중에 있을 때 간신들의 무고로 이곳 영일에 귀향되어 1151년 3월 21일에 사망하셨다. 선생의 묘소는 전함이 없이 5백여 년을 지내오다가 조선 경종 2년(1722년)에 읍성의 남쪽 구석에 후손들이 처음으로 묘단을 쌓고 제사를 올린 후 영조 때 이곳에 단소가 이루어졌다. 영천에 세거후손인 거유, 만양, 규양 형제의 발의로 석현 세복 등이 추진하여 이곳에 있던 영일관아를 철거 시킨 후 그 자리에 지어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