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어래산 현정사
김수종
남대리에서 길을 조금 더 가면 현정사(現靜寺)가 위치한 어래산((御來山 1063m)이 나온다. 어래산은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강원도 영월이 만나는 '삼도봉'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현정사는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가 만나는 어래산 아래에서도 가장 길지로 알려진 남대리에 터를 잡은 절이다.
지난 2001년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에 국제선원으로 창건된 현정사는 미국 예일대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던 중 지난 89년 숭산 스님을 만나 이듬해 출가한 현각(玄覺) 스님이 잠시 주지로 있던 곳이다.
현정사는 불교도인 정광명장(법명)씨가 사재를 털어 스님들의 참선수행을 돕기 위해 만든 사찰로, 평소 외부 활동을 자제해온 현각스님은 정씨의 각별한 요청과 숭산스님의 허락을 받아 주지를 맡았었다.
현각은 그 동안 <바로보인 증도가> <백유경> <선의 나침반> <만행 1, 2> <선학강의> <오직 모를 뿐> <부처를 쏴라> 등의 책을 출간했다. 그의 책 <만행 1, 2>는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부제로 발표되어 대단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현각에게 만행은 남다른 것도, 아주 특별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에게 만행은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일 뿐이다.
걷고 얘기하고 먹고 차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고 시장에 가는 모든 것. 빰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질주하는 차를 바라보는 것, 친구와 악수하며 감촉을 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수행이며 만행이다.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모든 것 이것이 바로 만행이다.'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는 말이 있다. '막다른 궁지' 혹은 '끝장'을 뜻하는 말로 뾰족한 묘안이 없어 어찌할 수 없게 된 사태를 뜻하는 말이다. 한자말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하나가 된 말이다. 그리고 이 이판과 사판은 불교 용어로서 조선시대에 생성된 말이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건국이념으로 불교를 억압하고 유학을 섬기는 것을 정책기조로 잡았다. 이것은 고려 말 '팔관회' 등의 불교 폐해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건국에 정도전과 같은 신흥 사대부 세력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불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정권교체와 함께 한순간에 숭배에서 탄압의 대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하층민으로 전락한 승려들 또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찰을 유지 존속시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불교의 역사와 맥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스님들은 절이 없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보기 위해 기름, 종이, 신발 등을 만드는 잡역에 종사하면서 사찰의 살림을 유지했다. 한편, 이들과는 달리 산간오지로 숨어들어 은둔하면서 사색과 명상,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는 승려들도 있었다. 이를 두고 앞의 잡역에 종사하는 스님들을 사판승, 뒤의 은둔하면서 참선을 주로 하는 스님들을 이판승이라 부르게 되었다.
결국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의 현대불교가 융성하게 된 것도 이 두 종류의 승려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원래의 이판사판의 뜻이 경도되어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된 데에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억불정책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정책이었다. 승려는 최하계층으로 전락하였으며, 도시 중심에 위치한 성안으로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당연히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래서 이판이나 사판은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하는 말이 된 것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일제와 해방 직후, 정권 차원에서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더욱 부정적 이미지로 몰아갔다. 이 두 부류를 정치적으로 이용, 서로 반목과 분열을 조장하여 이판사판의 잘못된 모습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은 뾰족한 대안이 없을 때 무의식으로 이판사판이라는 말을 쓴다.
갑자기 이판사판에 대한 근원과 설명을 쓴 이유는, 현각스님은 은둔하면서 사색과 명상을 통한 참선수행을 주로 하는 이판승이다. 그런데 지난 2001년 사판승이 하는 절의 주지 일을 맡았다. 이판승에게 사판승이 하는 일을 맡겼으니, 현정사에는 손님들이 들끓었고 조용한 남대리가 차분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정진수행을 위해 이내 주지를 그만두고, 다시 구도자의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