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제삿날이 아쉽다

돌아가신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

등록 2009.03.14 15:41수정 2009.03.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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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변 개나리 활짝 핀 덩굴앞에서 배시시 웃고 서 있는 친정엄마의 사진을 닦았다. 그리고 그 옆에 아버지의 사진과 엄마가 좋아하던 온 가족 30여명이 모인 사진도 찾아서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소소한 가족들의 동향들을 이야기 한다.

 

"엄마! 그간 있었던 일들 알려드릴께요.

우리집 종손인 호야 아기는 돌잔치를 얼마 전에 치렀구요.

저는 애들을 데리고 가서 금반지는 너무 비싸서 못해주고 그냥 봉투랑 옷이랑 주고 왔어요. 글구 둘째언니는 일본에 다시 가서 마지막 공부를 하는 중이구요.

 

언니 딸 희야는 세 번쨰 아이를 한 달 후에 낳구요.

큰 오빠는 여전히 사업하느라 바쁘고, 부산언니네 식구들은 잘 지내고,

세째오빠 아들 훈이는 무사히 제대해서 알바를 하고, 저한테 인사를 하고 갔구요.

둘째 오빠 준이는 엄마 살아계실 때 제 부모 몰래 강화도 데리고와서 인사시켰던 여친이랑 이번 봄꽃이 필 즈음 드디어 결혼해요 글구 둘째 올케도 경제일선에 뛰어들었고. 큰 올케는 등등."

 

언제나 나갔다가 들어오거나, 오랫만에 만나면 미주알 고주알 모두 꺼내어 막내의 애교를 넣어서 알콩 달콩  이야기 하면 참 좋아하셨던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제 엄마 아빠들보다 신세대를 잘 이해하던 할머니를 너무도 좋아하던 손주들이었으니까.

 

아마 하늘에 계신 엄마는 영성으로 모두 다 알고 있거나, 알 필요도 없을 빛 자체일지 모른다. 기실은 돌아가신 사람을 기억하며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살아서 늘 좀 더 사셨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는 막내의 그리움에서 나온 넋두리인지도 모른다.

 

한 달 1-2번 , 명절까지 합치면 일 년에 20번 이상의 제사를 치른 부모님 밑에서 어릴 때 부터 나는 여러가지 제사보조 역할에 익숙해졌다.

 

눈 앞에 펼쳐지는 제사를 위한 여러가지 일들은, 듣지 못하는 것과 상관없이 눈썰미와 수족의 부지런함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사때 없으면 안되는 가족의 중요한 일원이라는 것과 제사를 마친 후 여러 친척들과 화기애애 지내며 음식들을 나누는 부모님의 너른가슴과 넉넉한 표정들이 참 좋았다. 

 

초딩때 부터 도라지를 바가지에 소금뿌려 쓴내를 빼는 것도 내 역할이었고, 콩나물 꼬리자르는 것과 자질구레한 채소다듬기에 본격적인 전 부치기를 위한 밀가루 묻히기나, 삼색 전 또는 오색 전을 꼬치에 꿰는 것도 내 일이었다.

 

제사가 시작되거나 마치면 이것 저것 소반에 음식들을 나르고, 인근 이웃들이나 오지 않은 친척들에게 제사음식을 갖다주는 것도 내 역할이었다. 그렇게 제사보조를 하던 역할은 20세가 되던 해에 끝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되시며 병들자 큰 오빠집에서 제사를 받들게 된 것이다. 제사경험이 없어 힘든다는 올케를 위해 제사를 대폭 축소해서 3대만 모시기로 했다.

기존 제사의 1/3 정도만 하게 된 것이다. 이나마도 힘든다고 해서 3명의 아들이 역할분담을 했다. 큰 아들은 생선과 나물, 둘째는 각종 전과 떡, 셋째는 한과와 과일 등등 그리고 딸 들은 봉투를 내었다.

 

제사를 모실 때 병든 어머니는 구석에서 조용히 계시다가, 당신이 절할 차례가 되면 조상님들에게 자신이 모두 기존제사를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고, 세대가 달라졌으니 이해하시라고 정성껏 비셨다. 평생을 알뜰히 제사를 잘 받들고, 어려운 살림으로 노상장사도 하시면서  아들들을 남쪽지방에 살면서도 서울의 명문대학들을  보내 자리잡아 살게 하시고, 주위에 끊임없이 나눔을 펼치시다가 돌아가실때는 모든 장기를 기증하고, 병든 부분까지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주시고 간 어머니.

 

해마다 어머니 기일이 되면 많은 손주들이 우리 할머니는 이런 분이셨다 하고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성실과 겸손을 배우기를 바랬다. 그러나 웬 걸?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다음해 기다렸던 엄마의 기일에 제사가 없어졌다. 그리고 설날제사도 없어졌다. 아버지기일에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추석에 일 년 제사를 한꺼번에 한 상에 하기로 오빠들이 합의를 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 제사 모시는 것은 우리대에서만 하고 다음 세대에는 물려주지 말자고. 그러려면 지금부터 줄여가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대문 밖 사자밥도 알뜰히 챙기고,  극진하게 조상신들을 극진하게 모시던 부모님밑에서 자란지라 아직도 나에게는 이해가 잘 안가는 일이다.

 

아무리 산 사람이 중요하고, 시대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이렇게 사라지거나 짬뽕된 제삿날들에 미신이라 할 지언정 부모님의 영혼들이 혹시나 하고 이 땅에 잠깐 마실 나올 때 얼마나 허허하실까.

 

기억되지 못하는 슬픔은 우리 살아있는 존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세대의 안녕을 위한다면, 우리의 몸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일들을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좀 번거롭고 힘들더라도 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형제중에서 유독 멀리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막내딸로서 벙어리 냉가슴이 될 지언정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냥 부모님의 기일과 명절, 생일 그런 특별한 날에  객지에서나마 신부님에게 조촐한 미사예물을 드리고 촛불을 켜고 기원드릴 수밖에 없다. 

2009.03.14 15:41ⓒ 2009 OhmyNews
#사라지는 제사들 #친정엄마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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