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줄 읽으려고 화장실로 피신해요"
부엌데기 아줌마는 매일 허들을 넘는다

[현장] '줌마네'가 만든 연극 <내 나이 마흔에는>

등록 2009.03.08 11:17수정 2009.03.08 20:3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보이는 라디오 방송처럼 구성된 연극공연 무대. 실제 라디오에 문자로 사연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공연 중간중간 무대에 써 있는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내면 소개해주기도 했다.

보이는 라디오 방송처럼 구성된 연극공연 무대. 실제 라디오에 문자로 사연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공연 중간중간 무대에 써 있는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내면 소개해주기도 했다. ⓒ 장일호


지난 3일 저녁 8시 서울 마포구 성미산 마을극장에 씩씩한 '아줌마'들이 떴다. 줌마네(홈페이지 개편작업 중) 회원들이 지난 두 달간 직접 대본작업 및 연출, 무대연기까지 소화해내며 공들여 준비한 <라디오 편지쇼 아줌마시대- 내 나이 마흔에는>을 선보인 자리였다.


줌마네는 엄마로, 아내로, 그렇게 살다보니 단절된 세상을 살던 이른바 '전업주부' 아줌마들이 모인 공동체다. 아줌마들은 2001년부터 글쓰기 모임, 인문학 캠프, 여행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함께 모여 글을 배우던 사람들은 책을 묶어내기도 하고, 뒤늦게 배움의 열정을 불태운 한 회원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극까지 도전한 것.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때론 대본 작업에 밤을 지새워야 했고, 때론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연습시간 때문에 남편과 아이의 원성을 이겨내야 했다. 지치고 힘들다고 하소연할 법한데, 아줌마들의 얼굴에선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입을 모아 "즐거웠다"고 말하며 사춘기 소녀들처럼 깔깔 웃었다.

숨겨져 있던 재능을 하나 둘 꺼내는 시간

a  분장실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줌마네 회원들. 의상부터 분장, 헤어까지 모두 줌마네 회원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분장실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줌마네 회원들. 의상부터 분장, 헤어까지 모두 줌마네 회원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장일호


"내 30대를 여기에 묻었다"고 할 만큼 줌마네의 활동에 애정을 쏟고 있는 이연희(39)씨는 "아줌마들이 평소 드러내지 않고 숨겨져 있던 재능을 하나씩 꺼내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연극 내용은 아줌마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며 "나 혼자 일상을 끌어안고 있으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그걸 연극을 통해 공유하면서 치유가 되고 위안과 공감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실제 공연에서 이연희씨가 연기한 것은 본인의 이야기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보람도 있겠지만, 때론 밥 한 술보다 글 한 줄이 더 간절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가사와 육아는 그런 시간을 쉽게 허락해 주지 않는다. 신문을 펼치면 두 돌 된 둘째아이가 그 위에 주저앉아 훼방을 놓고, 책이라도 읽으려 하면 엄마보다 더 빨리 동화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내미는 첫째. 그가 피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화장실 독서에 빠져들 때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엄마, 똥마려워."


때론 엄마의 독서를 방해하는 아들이었지만 "누구보다 엄마의 활동에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아들"이라고 했다. 이씨는 "공연 전 날 아들이 '엄마, 연극 연습 열심히 하세요. 내일 멋진 모습 보여주세요'라고 적힌 편지를 써놓고 잠들어 있었다"며 자랑을 풀어놓았다.

반면 김지민(41)씨는 "보람은 공연이 마무리되는 순간에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공연 한 시간 앞두고 있는 지금도 엄마 없이 저녁 챙겨먹고 있을 아이들이 생각난다"며 "항상 그런 게 마음에 밟혀서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으로 연습에 임하곤 했다"고 털어 놓는다. 엄마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미안함은 이들에게 풀리지 않을 숙제일 것이다. 이혜경(44) 씨는 "아줌마로 산다는 건 매일매일 허들 넘기"라며 김지민씨의 말을 거들었다.


'보이는 라디오' 형식으로 진행되는 공연에서 라디오 DJ를 맡은 이혜경씨는 "처음 하다보니 부족함도 많고 실수도 많았지만 우리가 이 연극을 즐기고 누리자고 얘기했다"며 "연극을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성취감이나 동지의식을 만들어 냈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았던 김해영(59)씨는 "전문 연극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좀 실수하는 게 애교"라며 "실수하면서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줌마들의 특징"이라고 말하곤 씩씩하게 웃었다.

마흔, 아직 선명하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는 나이

a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과 공연 중인 줌마네 기상청 '오햇살' 통보관님. 오햇살 통보관 역은 김지민 씨가 맡았다.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과 공연 중인 줌마네 기상청 '오햇살' 통보관님. 오햇살 통보관 역은 김지민 씨가 맡았다. ⓒ 장일호


약 한 시간 가량 준비된 공연이 시작됐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8번 마을버스 여자 기사님의 화끈하면서도 따뜻한 성격에서 힘을 얻은 홍연지씨의 사연, 무뚝뚝하기만 했던 남편이 '내 니랑 결혼한 게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며 자랑하던 오원씨의 사연,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 나와 딸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던 유상심씨의 사연 등 약 10개의 에피소드가 무대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즈음, 박차라씨의 '마흔, 여자의 길찾기'라는 사연은 줌마네 존재의 이유와 공연의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이 둘 낳고 사는 동안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변한건지.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니 시간이 남더군요. 텅 빈 집에서 멍하니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유 없는 우울함에 남편의 위로를 바랐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가슴은 메말랐죠…. 제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길을 찾았습니다. 조금씩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고 하고 싶은 일도 생겼어요. 줌마네에서 글쓰기를 시작했고, 사진 찍기에 도전하기도 했고, 이번에는 연극에도 도전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어요…. 저는 아직 선명하지 않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외롭게 선 혼자가 아닌 홀로 선 수많은 다른 사람 곁에 나란히 선 혼자입니다. 지금 세상을 향해 무뎌진 도전장을 내려놓은 아줌마들에게 외치고 싶습니다. 믿는 만큼 이루는 세상이라고."

흔히들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대 위 박차라씨는 마흔을 '선명하지 않은 길'이라고, '믿는 만큼 이루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줌마네가 생각하는 마흔이 그러했다. 아직 선명하지 않고, 결심만 하면 놓여진 선택지가 많기에 여자 나이 마흔은 여자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기점이라는 것. 마흔이란 나이가 유혹이 되고 '아직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심장을 팔딱거리게 한다면 남은 삶은 얼마나 더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40, 50이 돼도 꿈만 있으면 언제든 이뤄진다

a  각자의 사연을 무대에서 낭독하고 있는 줌마네 회원들

각자의 사연을 무대에서 낭독하고 있는 줌마네 회원들 ⓒ 장일호


20, 30대를 불안함 속에 보냈던 이연희씨도 "줌마네 활동하면서부터는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미 열심히 살고 있는 언니들을 보면서, 내가 마흔이 되든 오십이 되든 언니들처럼 꿈을 잃지 않고 뭔가를 향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또 그는 줌마네 활동을 통해 젊은 시절 꿈이었던 동화작가의 꿈도 이뤘다. "늦었지만 꿈을 갖고 있으면 돌아가더라도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것을 배웠다"는 이씨의 말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40대를 힘들게 보내고 52세가 돼서야 줌마네를 알았다는 김해영씨는 "줌마네를 미리 알았으면 좋았겠다 싶더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그는 "혼자만 웅크려 있지 않고 같이 연대하면 힘든 걸 잘 넘을 수 있다는 '말걸기'로 공연이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혜경씨는 이번 연극을 "글의 또 다른 표현이 공연이자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글로써 본인들의 삶을 드러내고 바꾸는 것이 줌마네 회원들의 목적인 것. 그러나 혹시 모르겠다. 무대 위에서도 떨지 않고 당당한 아줌마들을 보며, 아직 선명하지 않은 그 길과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품은 그녀들이 전업 연극배우가 되어도 하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성미산 마을극장 개관기념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번 공연은 다가오는 10일(화) 저녁 8시에도 만날 수 있다.

a  8번 마을버스 운전 기사의 '빨간 립스틱'에 대한 사연을 소개하는 무대

8번 마을버스 운전 기사의 '빨간 립스틱'에 대한 사연을 소개하는 무대 ⓒ 장일호


#줌마네 #성미산 마을극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5. 5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윤 대통령, 24번째 거부권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윤 대통령, 24번째 거부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