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한인커뮤니티 사이트의 게시판 - '외환거래는 할 수 없'다는 공지를 비웃듯, 환전문의가 게시판 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봉렬
여기가 끝이 아니다. 복리후생 제도를 없애고, 월급을 삭감하고도 현상유지가 어려운 회사들은 일찌감치 감원에 나섰다. 싱가포르에서 제일 안정적이라던 DBS(은행)가 작년 말 900명을 감원한 소식은 싱가포르에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봇물 터지듯 진행된 각 기업들의 감원 바람이 한국인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금융과 IT 업종 회사에서는 현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임금인 한국인을 우선적으로 내 보내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면 한 달 안에(경우에 따라 최대 석 달) 싱가포르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짐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가는 이들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 온다. 함께 지내던 이웃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한국으로 떠나는 걸 지켜보는 남은 이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싱가포르를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올라 버린 환율에 한 푼이라도 아낀다는 심정으로 다들 허리띠 조이기에 나서는 형국이다. 외식을 줄이고, 택시 대신 버스나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는 건 기본이다. 덕분에 한국인을 대상으로 장사하던 한국 식당이 타격을 입고 있다. 손님을 끌기 위해 식당마다 경쟁적으로 가격을 낮추고 있다. 한 병에 25달러(2만5천원) 하던 소주 한 병을 10달러(1만원)까지 낮춰 파는 곳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장사가 안 돼 매물로 나온 한국 식당도 꽤 많아졌다.
그래도 싱가포르에서 돈을 버는 이주노동자는 낫다. 아이들 조기 유학 때문에 기러기 가족 생활을 하는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훨씬 심하다. 미국이나 캐나다보다 싸고 가까워서 2006년 전후로 수많은 기러기 가족들이 싱가포르에 왔다. 유학비용을 계산할 때 1달러에 600원으로 하고 예산을 세웠는데 1000원이 되어버린 지금, 앉아서 돈을 떼이는 기분에 다들 환율 떨어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환율 하락의 기대를 접은 기러기 가족들은 다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싱가포르 한국 이민자로서 지금 상황을 절망케 하는 건 싱가포르의 경제상황이나 환율이 아니라 바로 한국이다.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확인하는 한국의 소식은 싱가포르 상황에 못지 않게 나쁘기만 하다. 마이너스 성장과 더불어 나빠지기만 하는 고용의 질, 너무도 비교육적인 교육 현실, 용산참사로 대표되는 약자에 대한 횡포, 찾을 길 없는 사회안전망 등, 도무지 한국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발 딛고 사는 남의 땅에서는 자꾸만 등을 떠밀고, 언젠가 돌아 가야 할 내 땅은 도무지 정이 가지 않으니…, 불황은 이민자들을 오갈 데 없는 국제 난민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싱가포르를 곧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내 말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만 아니면 어디서든 새로 시작해 볼 수 있을 거야."
덧붙이는 글 | '불황이 OOO에 미치는 영향'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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