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배봉의 정상을 오르는 산책로 못지않게 오름 아래에서 그 주변을 돌아가는 농로도 운치가 있다. 농로 주변에 벚나무를 심어놓았는데, 봄에 꽃이 피면 주변의 돌담과 곱게 어우러진다. 오름 주변을 걷다보면 참나무 토막들이 오름 자락에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오름에 기대어 표고버섯 농사를 짓는 것이다.
오름 자락에는 무덤 수십 기가 겨울 햇살을 받고 있다. 어느 문중의 묘지인지 모르지만 동쪽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맞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다. 이 오름은 모든 것을 바쳐 마을에 살아있는 사람들을 지켜왔다. 그런데 죽은 자들도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안고 있으니 저 따스한 품에 뭍인 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자배봉의 바로 남쪽에는 '망앞'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망오름(자배봉)의 앞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위미 마을에 일주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민들로부터 집과 땅을 강제로 빼앗는 바람에,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했던 것이다.
한편, 망앞은 위미마을의 최초 정착자로 알려진 고좌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그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전해지는 고좌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고좌수는 재력과 위세가 대단하여 정의현에서도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욕심이 세고 심술이 사나웠는지, 지나는 사람을 불러서 억지로 자기 집에 일을 시켜도 거부할 만 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고좌수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다가왔다. 어느날 정의현청을 다녀오다가 술에 취한 나머지 한남리 지경에서 얼어죽고 만 것이다.
그런데 지나가던 청년이 고좌수의 주검을 발견했다. 그 청년은 고좌수가 평소 자신들에게 부렸던 행패를 떠올리더니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좌수의 성기를 자르고 만 것이다.
한편 고좌수의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육지에서 지관을 청해 명당터를 찾기 시작했는데, 당시 지관이 찾은 묘터는 '망앞'에 있었다. 당시 지관은 고좌수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떠나버렸다.
"이곳은 황우지지(黃牛之地)라는 명당터인데, 관을 묻을 때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은 시신이 위아래로 바뀌도록 엎어서 매장하고, 일이 끝난 후에는 앞으로 3년간 무슨 일이 있어도 무덤을 파헤쳐서는 안 됩니다."
이에 고좌수의 부인은 일가친척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주변에 장막을 쳐서 타인의 시선을 막은 상태에서 하인과 둘이 하관의식을 치렀다. 부인은 하인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신신당부하고 지관이 시킨대로 관을 뒤집어 매장을 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고 1년이 지나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고좌수의 두 아들이 갑자기 힘이 강해져서 당할 사람이 없어졌다. 그러더니 영문도 없이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고, 집안에서는 하인들에게 난폭하게 굴기 시작했다.
고좌수 부인은 아들들에게 '참고 자중해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아들들의 횡포는 갈수록 더해졌다. 그리다가 큰 아들은 좁은 제주에서는 더 이상 살수 없다고 하여 서울로 떠나버렸고, 형이 떠나버려 제 세상을 만난 둘째 아들은 더욱 포악해져 하인들에게 폭력만 일삼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고좌수의 하관에 함께했던 하인이 둘째아들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장례의 비밀을 깨고 말았다. 부친의 관을 뒤엎어 묻었다는 말을 들은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둘째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파헤치자 큰 황새 한 마리가 뒷발을 세우고 있다가 푸드득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란 나머지 흙을 다시 덮으려 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없어서 서울로 갔던 큰 아들이 역모 죄를 뒤집어쓰고 관아에 잡혀갔다. 그리고 관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역적의 집이라고 수색을 하니, 집의 창고에서는 난데없는 화약이 발견되어 둘째아들마저 역모 죄인으로 붙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고좌수의 집안은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권세라는 것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인데, 이를 제대로 쓰지 않고 민심을 잃은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권세를 잡고 있다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은 잘 세겨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죽은 후에 자신들의 성기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계속>
2009.02.25 11:56 | ⓒ 2009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