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현이 있던 자리에 창평면사무소가 들어섰다.
이상기
장흥 고씨들이 전남 담양 창평 삼지천에 터를 잡은 것은 임진왜란 전후이다. 의병장으로 알려진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두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를 데리고 김천일, 유팽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곳이 이곳 담양이다. 고경명은 1590년 가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1591년 여름 파직되어 광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고경명은 5월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주, 여산, 황간을 거쳐 7월 금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경명 고인후 부자는 이곳 와평(臥坪: 눈벌)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고경명의 시신은 화순현 흑토평에 묻히게 되었고 고인후의 시신은 창평현 수곡리에 묻히게 되었다.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 1561-1592)가 창평에 묻히게 된 것은 처가인 함풍이씨가 창평에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후는 32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함풍 이씨와의 사이에 이미 부림, 부천, 부즙, 부량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창평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장흥 고씨들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창평 삼지천 마을에 살고 있는 고씨들은 모두 고인후의 후손이다.
삼지천 마을의 문화와 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