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공연, 긴 여운... "초록빛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리뷰] 극단 드림플레이의 <초록비가 내리던 그곳>

등록 2009.02.15 09:59수정 2009.02.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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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초록비가 내리던 그곳
연극 초록비가 내리던 그곳이승철
연극 초록비가 내리던 그곳 ⓒ 이승철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고려말의 유신 야은 길재가 쓴 시구 중의 두 행이다. 야은은 망해버린 고려의 도읍지 송도(개성)를 돌아본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천 즉 자연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당대의 인재(벼슬아치)들은 변절하여 조선의 신하가 되어버린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그렇게 변하는 것들 중에서도 사람의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것도 드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야은 길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가슴아파했던 것 같다.

 

그럼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속도가 느린 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야은의 시구처럼 산천, 즉 자연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수백 년 수천 년이 흘러도 옛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적어도 옛날에는 그랬다. 수십 년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고,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는 너무 잘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깊은 향수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운 고향에는 동구 밖 정자나무에 깃들인 까치가 있고, 산그늘 드리운 작은 호수와 뒷동산의 늙은 소나무 아래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선 옛 모습 그대로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개발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뒷동산은 고사하고 산이고 바다고 닥치는 대로 밀어버리고 옛 모습을 지워버린다. 그렇게 지워버리는 것들 중엔 삶의 가치와 방식까지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변하는 사회에서 사람의 마음인들 온전하겠는가.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늙은 아버지와 젊은 아들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거나 배려할 겨를도 없이 각자의 길을 간다, 세대 간의 갈등이자 단절된 소통의 문제다.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배우들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배우들이승철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배우들 ⓒ 이승철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공연 중인 극단 드림플레이의 겨울잠 프로젝트 '사람이었네' 중 '정욱이'와 함께 올려진 '초록비가 내리던 그곳'은 지팡이를 짚은 늙은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있는 무기수 아들을 면회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강도 살인죄로 무기수가 된 민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듣고 잠깐 동안의 귀휴를 허락받는다. 이들 부자의 사연을 듣게 된 같은 고향출신의 사회복지사 지현이 그의 안내를 자원하여 맡는다.

 

이들의 고향은 갯벌과 염전이 있었던 바닷가, 그러나 염전과 소금창고가 있었던 아름다웠던 바닷가는 삭막한 간척지가 되어 부서진 소금창고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염전에서 소금밭 일로 평생을 살아가는 아버지가 싫어 아버지의 전 재산을 들고 도시로 날랐던 민호는 강도 살인자가 되어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의 오롯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지현과 함께 부서져 버린 소금창고를 바라보는 민호는 평생을 소금 만드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아버지를 추억한다. "이곳이 무너지는 날 아버지도 같이 무너지셨을 텐데…" 하고 회고하는 민호는 뒤늦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만나고 내려오는 길에서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갔던 호수를 바라보며 지현으로부터 아버지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는다. 지현은 늙은 민호 아버지를 돌보았던 사회복지사였다. 생전의 민호 아버지는 감옥에 있는 아들을 그리며 뜨개질로 목도리를 짠다.

 

그는 지현에게 먼 훗날 만나게 될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써주기를 부탁하기도 하고, "저 호수도 곧 메워 버린다는 구먼, 그럼 갈 곳도 없는데" 하며 아쉬워 하다가 "염전이 시커먼 흙으로 덮여 버리더라고, 어쩌겠어? 저 위에서 하는 일이라는데. 그냥 억장이 무너져 내렸지"라며 지난 시절을 회고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싫어 집을 떠난 아들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이 막혀 있던 부자는 영원한 이별을 한 후에야 서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자간의 소통부재를 아쉬워 할뿐만 아니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삭막하게 변해버린 아름다웠던 바닷가 염전 마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 속의 지현과 민호의 늙은 아버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뒤편의 배경 속에서는 민호가 쏟아지는 초록비를 맞으며 아버지와 아름다웠던 바닷가 고향마을을 그린다. 푸르고 아름다웠던 고향마을과 그리움 가득한 그 시절의 초록비는 다시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무거운 주제만큼이나 지하공연장의 분위기도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놓칠세라 숨죽인 관객들도 배우들의 공연에 몰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 여운을 남긴 공연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에 회색빛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초록빛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어린 시절 모습과 점점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고향에서의 모든 추억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쉽게 잊고 흘려보냈던 시간을 회상해 봅니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는 마음속에서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들입니다.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지난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 연출자

2009.02.15 09:59ⓒ 2009 OhmyNews
#연극 #극단 드림플레이 #연극실험실 #이승철 #혜화동 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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