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바라본 앞개바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바닷가다.
장태욱
2000년 이후 귤이 과잉 생산되고 외국산 오렌지 수입이 본격화되면서 제주의 귤 농가는 몇 해 동안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애써 귤을 재배해서 들어오는 돈은 생활비는 고사하고 생산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때가 부지기수였다. '뉴 밀레니엄'이란 현란한 수식어로 찾아온 새로운 시대는 농민들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스러운 터널이었다.
고향 위미마을에서 귤을 재배하시던 부모님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희망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로 몇 해를 버텨봤지만 결국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셨다. 아름드리 귤나무는 평당 8천원의 보상비를 대가로 기계톱에 사정없이 잘려나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이런 것이었을까? 잘려나간 나무가 눈에 아른거려 그 나무 근처에는 몇 달 동안 얼씬도 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우리 가족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그 땅은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새로운 임자를 만났다. 과수원을 폐원해서 받은 보상비와 땅 판 돈을 합해도 부모님의 부채를 다 막을 수는 없었나 보다. 결국 마지막 남은 고향집마저도 법원 경매로 팔려나갔다.
부모님은 사글세 집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제주시내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차례 꼬박꼬박 고향을 찾던 나는 결국 찾을 고향집도 없는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그 몇 달 동안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고향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외할머니·외할아버지 제사에도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 찾아뵐 수 없었고 명절도 시내에서 부모님 모시고 조촐하게 지내야 했다. 어쩌다 고향마을을 지날 일이 있어도 그곳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실향은 우리에게 예상보다 깊고 서러운 고통을 남겼다.
실향, 그 서럽고 고통스런 이야기를 뒤로하고 귀향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