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 포스터
싸이더스
가혹한 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설. 미혼과 비혼 사이의 나홀로족들, 즉 세상에서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거나 좀 지난 이들에게는 예전에 없던 우울증과 신경증이 생길만큼 성가시고 불편한 날이다. 결혼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매우 묽어지고 당사자들 역시 적극성을 띄지 않는 게 보편적 현상이 돼 가는 요즘이지만 이번 설도 예외는 없었다. 아니 좀 더 지독하고 가혹했다.
설을 쇠러 고향으로 가던 날, 청원을 넘어 대전을 지날 무렵 눈발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굵게 연기처럼 도로 위를 하얗게 서성거리는 눈발을 스쳐지났다. 그 탓에 평소보다 조금 더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낸 후 고향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치 이를 알아내기라도 한 듯 친구의 문자메시지가 벨소리와 함께 날아들었다. "25일 저녁 6시 ○○해물탕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고향 친구들 7명의 모임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20여 년을 함께 하고 있는 7명 가운데 2명만이 고향에서 직장엘 다닌다. 나머지는 모두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산다. 그러다보니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어 만나는 일이 아니라면 자주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그나마 모두가 대한민국의 장남들이니 명절에는 자연스레 고향집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부담 없이 만나 회포를 풀기에 가장 좋은 때가 설이나 한가위의 명절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7명 가운데 기혼과 미혼(혹은 비혼)의 비율은 5 대 2.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20대에 결혼을 한 친구들은 이미 학부모가 됐다. 아들딸을 셋씩이나 낳아 인구정책에 이바지 하는 애국자도 있다. 당연히 미혼과 비혼 사이에서 아직도 삶의 가늠자를 조절하고 있는 2명의 '나홀로 총각'도 있다. 그 미혼과 비혼 사이의 1/2이 바로 나다.
고향친구 7명 가운데 '비애국자'는 나 포함해 2명 언제부턴가 모임이 열리면 나홀로 총각들의 삶이 친구들 사이의 화제 1순위가 됐다. 인사를 대신한 반가운 악수를 나누자마자 잔소리들이 시작된다.
"이번에도 혼자 온 거냐?"(결혼한 친구가 생기면서 모임은 부부동반이 됐다)"야, 니들은 올해도 그냥 넘어갈 거냐? 언제 어른 될래?""이제 더 이상 못 봐주겠다. 아직도 20대인 줄 착각하고 사는 거야? 올해 넘기면 축의금은 없다!""나는 오히려 니들이 정말 부럽다. 결혼해봐야 죽을 맛이다. 애는 자꾸 커 가는데 마음만큼 되는 일은 없고…. 차라리 속 편하게 혼자 여유 즐기며 사는 게 훨씬 낫다. 결혼 하지마라!"
염려가 담긴 충고인지 조언을 가장한 염장지르기인지 헷갈리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받아 넘겨버린다. 죽지도 않고 또 찾아온 옛날에 왔던 각설이타령이려니 무시하면 된다. 올해를 넘기게 되면 축하의 마음을 더욱 듬뿍 담아 축의금이나 왕창 내놓으라며 맞서고는 함께 벌쭉벌쭉 웃으면 그만이다. "빠르고 늦은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세상의 인연이란 다 때가 있는 법이고 우린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말 정도를 나직하게 읊조려 보태면 된다.
그나마 지난 추석 때까지는 두 명의 나홀로가 함께 참석했기에 협동작전으로 대응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설모임에는 한 명이 빠졌다. 다른 사정으로 내려오지 못 했다. 진정한 나홀로가 된 것이다.
때는 이 때다 싶었는지 남편을 따라 모임에 함께 나온 친구의 아내들까지 "나이도 있는데 이제는 가야하는 거 아니냐"며 합세하는데 혼자 방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상에 나이 없는 사람도 있나? 백짓장뿐만 아니라 나홀로도 맞들어야 나은 거였다니.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물탕과 찜으로 푸지게 저녁을 먹은 후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나는데 부르르 진동이 전해졌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제자 녀석이었다. 설 안부 인사 전화려니 싶었다. 녀석은 설 잘 보내시라는 인사 끝에 "주례 좀 봐 주세요"라고 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결혼을 한단다. 3월 28일로 날을 잡았다고. 이미 제 친구들 가운데는 결혼한 녀석들이 제법 있다. 아이를 낳아 엄마, 아빠가 된 녀석들도 있다. 벌써 나이가 서른 살 안팎이 될 테니 못할 것도 없겠다. 당연히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날더러 주례라니…….
노총각 가슴에 쐐기를 박는 "선생님, 주례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