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기에 타고 있는 아이가 바로 동생의 아들이자 우리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 '해빈'이다. 그리고 우리집 공주님들 왼쪽부터 해각, 해목, 영은(조카).
조경국
'책임의식마저 진즉 소멸되었다'는 그의 말은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중삼중의 책무는 그대로 존재하는데 책임의식이 소멸될 경우 이래저래 피곤해진다는 사실이다. 책임의식도 없는데 집안 행사를 챙기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찮은 일이겠는가. 그런데 이 책임의식을 끊임없이 불어넣는 연례행사가 바로 설과 추석이다. 평상시 무장해제하고 있던 30대 장남의 책임의식도 이 날만큼은 바로 세워야 한다.
하지만 설 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복귀하는 순간 장남의 책임의식은 다시 소멸 상태로 돌아간다. 늦둥이라도 형편 풀리면 아들 하나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집안 어르신들의 말씀은 한 귀로 흘리고, 다음 시제는 우리 항렬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된다고 마음을 놓는다.
그리고 아예 이번 설은 무책임한 장손이 되어버렸다. 워크숍에 참석한다는 핑계(참석한다는 것은 사실이다)를 대고 고향 앞으로, 대신 비행기 타고 설날 아침 해외로 떠난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을 때쯤이면 동생과 당숙이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다닐 것이다. 그리고 내가 들을 잔소리를 동생이 모두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설날 비행기 타고 떠나는 것에 부담(?)이 없다. 그 이유는 집안 어르신들 앞에서 내가 "더 이상 손자 보실 생각을 마시라" 선포를 하고 큰 불효(?)를 저지른 이후 딸만 있는 우리 집안에 동생이 2년 전 '손'을 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장손은 내가 아닌 동생의 아들, 장조카다.
내가 없어도 동생이 알아서 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동생이 아들을 낳는 순간 반쯤 짐을 벗어버린 기분이었다. '장손의 부모'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동생이나 제수씨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로선 동생이나 제수씨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만큼 마음이 가벼워지는 셈이다. 참 철없는 심보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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