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6년 3월 집총을 거부하다 군에서 사망한 여호와의 증인 고 이춘길씨(가운데).
한국워치타워협회 제공
"춘길이가 안 죽었으면 내가 죽었을 거였죠. 춘길이가 시력이 안 좋았고 운동신경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보다 더 많이 맞고…. 난 무릎 꿇고 다음 구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춘길이가 쓰러지니까…."1976년 3월 집총을 거부하다 헌병대 영창에서 구타로 사망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이춘길(당시 25세)씨를 기억하던 장영규(58·부산)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육군 39사단 훈련소에서 만나 '여호와의 증인' 교우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영창에도 함께 끌려갔다. 그곳에서 장씨는 "짐승보다 못한 대우"와 고 이춘길씨의 폭행 사망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주검이 된 동기 덕분에 난 그곳에서 살아나왔다""여호와의 증인은 밥도 굶겼죠. 주먹밥을 하루 한 개 줬나. 헌병들 먹다 남은 밥으로. 아침 10시부터 하루 종일 무자비하게 팼어요."종교적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던 이씨는 입대 열흘 만에 주검이 돼서야 영창을 나올 수 있었다. 장씨는 이씨의 사망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장씨는 "잊을 수 없는 동기" 이씨에게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30년 넘게 묻혀 있던 진실은 지난 2005년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위원회가 출범하고 나서야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국가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씨의 죽음을 마음에 묻고 살던 장씨는 군의문사위 출범 뒤 "진실이라도 밝혀 달라"며 진정을 냈다. 올해 1월 군의문사위는 "이춘길씨가 군 및 국가의 반인권적 폭력으로 사망했다"며 국가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일로 장씨는 '마음의 빚'을 청산했을까.
"군의문사위 결정도 환영하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사람은 벌써 죽고 없는데. 지금도 가슴 아프죠." "어머니는 화병으로 죽고, 아버지는 폐지 모아 근근이..."군의문사위는 1975~1985년 군사정권 시절 군에서 사망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5명에 대해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리고 진정인과 가족에게 통보했다. 김종식(1975년 사망)·이춘길·정상복(이상 1976년 사망)·김선태(1981년 사망)·김영근(1985년 사망)씨가 그들이다.
군의문사위 결정은 올해 1월 이의신청기간(60일 이내)이 지나 최종 확정됐다. 이 결정으로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가족과 지인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형형'이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일 잘하는 건장한 청년이었죠. 근데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니까, 가슴 칠 일 아닙니까?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80살이 넘은 아버지는 폐지 모아서 근근이 살고 있는데."정상복(당시 22세) 사건의 진정인 서영태(74·경북 포항)씨는 뒤늦은 국가 책임 인정 결정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을 잃은 노모는 "사방팔방으로 이의를 제기하며" 뛰어다녔지만, 군 당국과 정부에 의해 차갑게 외면 당했다. 올해 1월, 정씨 죽음에 얽힌 진실은 드러났지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양심적 병역거부도 세계 수준에 맞게 돼야죠. 지금도 수감된 사람 얼마나 많은데... 위정자들이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부끄러운 일이죠. 군의문사위 없앤다고 하는데, 더 오랫동안 지속시켜서 이런 일이 한국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국가 폭력'에 항의하는 서씨의 목소리에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국가손해배상 청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