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 속살이 먹음직스럽네"

겨울 한낮, 아이들과 함께 연탄불에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등록 2009.01.19 12:09수정 2009.01.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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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촉한 속살이 먹음직스러운 군고구마. 겨울날의 간식으로 최고다.
촉촉한 속살이 먹음직스러운 군고구마. 겨울날의 간식으로 최고다.이돈삼

늦은 점심을 먹고 한동안 놀던 아이들이 묻습니다. "오늘은 어디 안 가냐"고. "집에만 계속 있으니까 재미없다"면서. 하지만 밖에는 비가 내립니다. 게다가 집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 몸도 피곤합니다.


"쉬는 날은 꼭 나가야 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빠 오늘 집에서 할 일이 있고, 또 저녁에는 가족모임이 있어서 나가야 되잖아. 낮에는 그냥 집에 있자. 너희들도 책 좀 보고…."
"알았어요."

아이들은 그래도 못내 서운한 표정입니다. 그래서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점심 먹은 지 조금 지났고 아이들도 좋아하겠다 싶었죠.

"너희들 고구마 구워 줄까?"
"좋아요."

둘째 아이 예슬이가 화들짝 반깁니다. 그 먹성이 대단하다 싶습니다. 큰 아이 슬비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입니다.


 예슬이가 고무장갑을 끼고 고구마를 씻으려고 하고 있다.
예슬이가 고무장갑을 끼고 고구마를 씻으려고 하고 있다.이돈삼
"예슬아! 오늘은 네가 고구마 직접 구워볼래?"
"그래요."

고구마를 직접 굽겠다는 예슬이를 데리고 보일러실 쪽으로 나갔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시켜먹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네가 직접 골라봐. 너무 큰 것은 잘 익지 않으니까 적당한 크기로 골라야 해."
"몇 개나 할까요?"

"한 스무 개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알았어요."

흙 묻은 고구마를 담아가지고 들어온 예슬이한테 다시 말을 건넸습니다.

"씻는 것도 네가 직접 해야지."
"씻는 것도요?"
"당연하지."

고무장갑을 챙겨 아이한테 끼워주고 직접 씻도록 하고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깨끗하게 잘 씻습니다. 그럭저럭 자세도 나옵니다.

"아! 손 시려워. 따뜻한 물로 해야지."

금세 다 씻더니 "한 번 더 씻어야 된다"며 또 씻습니다. 물 아깝단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제가 씻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됐죠?"
"은박지에 싸는 것도 네가 해야지."

"예?"
"네가 다 하기로 했잖아."

"그럼 아빠는요?"
"예슬이가 다 구워주면 먹어야지."

 예슬이가 은박지로 감싼 고구마를 들고 있다. 생김새가 '왕사탕'과 닮았다면서.
예슬이가 은박지로 감싼 고구마를 들고 있다. 생김새가 '왕사탕'과 닮았다면서.이돈삼

"근데 진짜 내가 다 하네"

예슬이는 "진짜 나한테만 다 시킬 거예요?"라며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식탁에 쟁반과 은박지를 가져다 놓고 의자에 앉습니다. 그러면서 큰 고구마는 은박지를 크게 찢어서, 작은 것은 작게 찢어서 감싸기 시작합니다.

"이거는 왕사탕이다. 이건 막대사탕…."

고구마를 은박지로 싸면서도 비닐 속 사탕처럼 양쪽으로 모양을 만들어 이름을 하나씩 모두 붙입니다.

"연탄불에 올리는 것도 네가 해야지."
"그렇게 할게요. 근데 진짜 내가 다 하네."

 겨울날 따스함의 대명사였던 연탄불. 추억여행을 선사해 주는 매개체다.
겨울날 따스함의 대명사였던 연탄불. 추억여행을 선사해 주는 매개체다.이돈삼

이번엔 은박지로 감싼 고구마가 담긴 쟁반을 아이한테 들라고 해서 연탄불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곤 연탄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어주면서 불 위에 하나씩 직접 넣으라고 했습니다. 불 위에 고구마를 직접 올리는 게 재미있는지, 아니면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했다는 게 뿌듯했는지 표정이 밝아 보입니다.

"다 됐다. 이제 들어가서 하던 일 마저 해라. 나머지는 아빠가 할게."
"다 구워지려면 얼마나 걸려요?"
"어, 불이 위에 있으니까 20∼30분 걸릴 것 같은데."

아이가 들어간 이후 담배 하나 피우고 나니 벌써 고구마 익어가는 냄새가 코를 통해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순간 옛날 생각이 스며옵니다. 입 주변이 시커멓게 변하고 입술을 데우면서까지 먹던 그 군고구마가…. 연탄 뚜껑을 열어 고구마를 뒤집어 주고 잠시 방에 들어갔다 나오니 고구마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뚜껑을 열어 은박지 위로 고구마를 만져보니 말랑말랑해졌습니다. 조그마한 것부터 꺼내 쟁반에 옮기고 큰 것은 또 방향을 바꿔주니 벌써 다 익었습니다.

 은박지에 싸여 연탄불 위에 올려진 고구마(왼쪽)와 다 구워져 은박지를 벗은 고구마(오른쪽).
은박지에 싸여 연탄불 위에 올려진 고구마(왼쪽)와 다 구워져 은박지를 벗은 고구마(오른쪽). 이돈삼

은박지를 벗겨내니 훈김이 모락모락...

"얘들아! 군고구마 먹자."
"벌써 다 익었어요?"

방에 들어가서도 촉각을 연탄불에 곤두세워 놓고 있었는지 예슬이가 먼저 달려와 묻습니다.

"와! 맛있겠다. 언니, 고구마 먹게 빨리 와."

감싼 은박지를 하나씩 벗겨내니 훈김이 모락모락 묻어납니다. 고구마가 정말 맛있게 익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 사 먹던 군고구마인데, 연탄보일러를 놓은 뒤로 겨울이면 어렵지 않게 구워 먹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군고구마의 맛을 익히 알고 있던 터여서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그래도 좋아합니다.

"아빠! 나는 뜨거워서 못 먹겠어. 접시에다 까서 주면 안돼요?"
"알았어. 접시 가져와라."

 다 익은 고구마. 껍질을 벗기니 속살이 드러난다. 촉촉한 게 정말 맛있게 생겼다.
다 익은 고구마. 껍질을 벗기니 속살이 드러난다. 촉촉한 게 정말 맛있게 생겼다.이돈삼

예슬이가 접시와 포크 두 개씩을 가져오더니 사이좋게 언니 앞에도 놔둡니다. 뜨거운 고구마 껍질을 벗기니 촉촉한 속살이 드러납니다. 먹음직스럽게 보입니다. 아이들도 빨리 달라며 보챕니다.

예슬이는 "내가 한 것이어서 더 맛있는 것 같다"면서 으스댑니다. 슬비도 "군고구마가 역시 맛있다"며 까놓은 즉시 해치웁니다. 역시 고구마는 쪄먹는 것보다 연탄불에 구워먹어야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장작불이나 짚불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연탄불에 익은 고구마의 맛이 그만입니다.

어릴 적 동치미와 함께 먹던 그 군고구마의 맛입니다. 군고구마를 먹으며 아이들에게 옛 겨울날의 아련한 추억도 함께 들려줍니다. 동치미에 곁들여 먹는 군고구마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예슬이는 "동치미 대신 시원한 물과 함께 먹으면 맛있다"면서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냅니다.

차가운 물 한 모금이 군고구마로 뜨겁게 달궈진 입 안을 보호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슬이는 다음에도 고구마를 집접 굽겠다고 합니다. 탐탁치 않게 여기던 슬비도 다음엔 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겨울비와 연탄불, 고구마가 만들어준 휴일 한낮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의 한 편으로 남을 것만 같습니다.

 군고구마를 한 입 베어물고 있는 예슬이. 군고구마 '귀신'이다.
군고구마를 한 입 베어물고 있는 예슬이. 군고구마 '귀신'이다.이돈삼

#군고구마 #연탄불 #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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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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