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총거부 뒤 물고문과 얼차려를 받다 숨진 고 김종식씨.
한국워치타워협회 제공
1975년 10월 23일 훈련소에 입소해 20일 만에 숨진 김종식(당시 20세)씨는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씨와 훈련소에서 같이 생활한 행정병 동료는 "당시 소대장 정아무개 중위가 샤워실로 끌고 가 물탱크(가로 3m, 세로 1.5m, 깊이 0.7m)에 머리를 수차례 담갔다 빼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또 영하의 날씨에 속옷만 입고 연병장에 서 있는 얼차려를 받았다고 한다. 반복된 구타와 얼차려를 받던 김씨는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쳐 사망했다.
이 밖에도 밖으로 끌고 가 눈을 가린 채 "총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방독면을 벗긴 채 가스실에 집어넣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빈 드럼통에 집어넣고 언덕에서 굴리는 고문도 당해야 했다. 사망한 김영근씨와 같은 시기에 입대한 여호와의 증인 교우 허아무개씨는 "어떤 대위가 저를 아무도 없는데 끌고 가더니 '여호와의 증인은 수혈 안 받지, 너 묶어 놓고 강제수혈 시키겠다'고 협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왕국회관 급습... 구속 기다리는 숫자만 500명군의문사위가 집총거부를 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5명에 대해 '국가 책임'을 인정한 이유는 이런 비인도적 행위가 조직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군의문사위 조사결과 여호와의 증인들은 훈련소 입소 직후부터 기간병, 초급지휘관(소대장, 중대장), 헌병에게 차례로 인계되면서 무차별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지휘계통이 아닌 '타 중대 중대장'까지 나서 잔혹하게 폭행했다.
5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은 당시 군사정권의 방침 때문이었다.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병무청을 신설하고, 1973년 "병역기피자와 부모가 이 사회에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한 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국방부와 병무청의 '검거 대상'이 돼 버렸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병무청 직원, 검찰, 경찰은 1975년 3월 9일 부산시내 19개 왕국회관(여호와의 증인 집회 장소)를 급습해 63명을 강제입영 시키기도 했다(3.9 사태).
특히 군은 "여호와의 증인을 한 순간도 놀리지 말고 재복무하도록 하라"는 지침을 따로 내려 이들을 집중 관리했다. 상급부대의 지침을 받은 장교와 기간병들은 '실적'을 위해 집총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들을 학대했다는 게 군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다.
군의문사위가 국가 책임을 인정한 여호와의 증인 사망사건은 모두 군사정권 아래 벌어진 일이지만,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정부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나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결정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