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장준하 기념사업회
장준하는 출판 문화인으로 대성했다. 그가 만든 잡지 <사상계> 는 뜻있는 한국 지식인들의 열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5·16 후 정권 민정 이약 약속을 위배하자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에 나서게 된다. 1974년 그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징역 15년을 언도받는다.
이미 그것은 장준하의 세 번째 옥살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연말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 하지만 그 석방은 박정희의 회유책이었다. 그는 간과 심장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한 장준하는 불과 며칠 후인 1월 8일 박정희에게 '병상에서 보내는 편지'를 띄운다.
1. 파괴된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민족 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민주 헌법으로 하여, 이 헌법에 의해 자신의 거취를 지혜롭고 명예롭게 스스로 택함은 물론, 앞으로 모든 집권자들의 규범으로 삼게 할 것.2.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전원 무조건 석방할 것.3. 학원· 종교· 언론 사찰을 즉각 중단하고 야비한 정보 정치의 수법인 이간 분열 공작으로 더 이상 불신 풍조와 상호 배신행위 습성을 우리 사회에 조장하지 말 것.그 해 여름 장준하는 서울 교외에 있는 산에 오르다 떨어져 죽는다. 여러 명이 같이 간 산행이었지만 그의 추락 장면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가 죽기 전 웬 군인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사람은 있었다.
가슴에 두 손을 얹은 채 얌전히 누워 죽어 있던 장준하의 후두부는 직경 2센티 크기로 깊이 함몰되어 있었다. 장준하의 죽음은 그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김구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킨 채 끝내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이강국은 인민군 야전병원장을 맡아 서둘러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김수임이 아직 총살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김수임의 형이 확정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수임은 6· 25보다 일주일 전인 6월 18일에 총살되고 없었다.
이강국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한직으로 밀려났다. 남한에서 임정세력이 몰락했듯이 북한에서는 남로당 세력이 거의 같은 시기에 제거된 것이다. 그의 정치적 선배이자 스승인 박헌영은 이미 산골 오지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강국이 체포된 것은 6· 25 직후였다. 그는 박헌영과 함께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 받는다. 남쪽의 연인 김수임과 마찬가지의 죄목인 간첩죄였다. 연인이 남과 북에서 각각 똑같은 간첩죄로 사형 언도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얼마 후 박헌영과 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했다.
임수경·임주호 남매의 성취임주호는 6· 25 덕분에 감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느 날 덜커덕 감방 문이 열리더니 문 앞에 이강국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이강국은 임주호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강국과 임주호는 밤새도록 보드카를 마셨다. 임주호의 누나 임수경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강국은 임주호에게 월북을 권유했지만, 임수경이 고개를 저었다.
임수경은 동생이 구속되자 서둘러 미국에 다녀왔었다. 그는 변호사를 사서 자신의 미국 국적 취득 건을 맡겼다. 그녀가 미국 국가 안보를 위해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한 경력은 미국 국적 취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베어드를 찾아가 임주호의 석방 탄원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던 차에 6· 25가 터진 것이었다.
이강국 덕분에 석방된 임주호는 밀항선을 타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령 괌으로 들어갔다. 임수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매는 괌에서 작은 호텔을 경영하다가 임주호의 법적 거주 문제가 해결되자 미국 본토로 옮겨갔다. 임주호의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러갔다. 스웨덴의 왕립아카데미에서는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남매 과학자 임수경· 임주호가 노벨 물리학상의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남매 과학자는 며칠 후 미국인 국적으로는 상을 받지 않겠다고 스웨덴에 전화했다. 노벨 위원회는 그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그들의 수상 거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상자는 한 번 결정 후 번복될 수는 없다'는 규정에 따라 그 해의 물리학상 수상자는 없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끝)
덧붙이는 글 | 오늘 187회 연재로써 3부작 <제국과 인간>을 마감합니다. 1년 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새 소설로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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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인간(187) 마지막 회] 여섯 명의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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