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어계는 왜 꺼이꺼이 울고 있을까?

[그 품에 안기고 싶다 110] 생육신 어계 조려가 낚시로 울분 달래던 '어조대 고마암'

등록 2009.01.13 18:46수정 2009.01.1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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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조대 어조대에 새겨진 선각불상
어조대어조대에 새겨진 선각불상 이종찬
▲ 어조대 어조대에 새겨진 선각불상 ⓒ 이종찬

한반도 곳곳을 꼼꼼하게 여행하다 보면 오래 묵은 정자나 큰 바위 위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백세청풍이란 은나라가 망하자 '의롭지 못한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중국산성)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다 굶어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뜻한다.

 

이 첫 머리 글자 백세(百世)는 일백 살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일백 세대를 뜻한다. 따라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면 30년 곱하기 100년이니 3000년이란 숫자가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백세, 즉 3천 년이란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된 그런 숫자가 아니라 '오랜 세월, 영원'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청풍(淸風)도 마찬가지다. 청(맑은 淸)은 매섭도록 맑고 높다는 뜻이다. 그 뒤에 따르는 글자 풍(風) 또한 그냥 바람(바람 風)이 아니라 군자(君子)가 지닌 덕(德)이자 절개를 뜻한다. 따라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네 글자 속에 들어 있는 속뜻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가 지닌 절개'를 말한다.

 

한반도 곳곳에 '백세청풍'이란 네 글자가 흔히 눈에 띠는 것도 우리 역사 속에 가라앉아 있는 한 시대 한 세월이 그만큼 어렵고 힘겨웠으며, 그 고통스런 시대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한 절개 높은 선비가 많았다는 뜻이다. 경남 함안에 있는 채미정(採微亭)과 청풍대(淸風臺), 어조대(漁釣臺)와 고마암도(叩馬巖)도 그 중 하나다. 

 

함안 대표하는 인물 어계 조려 선생 발자취가 머무는 곳

 

서산서원 생육신 어계가 고향에 내려와 숨어 살았던 곳
서산서원생육신 어계가 고향에 내려와 숨어 살았던 곳이종찬
▲ 서산서원 생육신 어계가 고향에 내려와 숨어 살았던 곳 ⓒ 이종찬

세조가 조선 단종을 임금 자리에서 쫓아내자 김시습, 이맹전, 원호, 성담수, 남효온과 더불어 '생육신'이 되어 고향 경남 함안으로 내려온 유학자 어계(漁溪) 조려(趙旅, 1420~1489) 선생. 어계는 이곳에다 평생 고사리만 먹고 살겠다는 뜻으로 채미정을 짓고, '백세청풍'이란 네 글자를 내걸었다.

 

지난 4일(일) 오전 10시. 어계가 남긴 흔적이 새록새록 숨 쉬고 있는 함안 원북 마을과 하림 마을로 간다. 함안 조씨가 모여 사는 이 마을에는 함안을 대표하는 인물인 어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머물던 서산서원과 어계 고택, 채미정, 청풍대 등이 있다. 저만치 흐르는 개울에는 어계가 낚시를 하며 울분을 삭이던 어조대와 고마암도 있다.  

 

벼 밑둥치만 을씨년스럽게 남은 논을 끼고 있는 원북 마을. 경전선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는 이 마을에 들어서자 들녘 한가운데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반듯하게 지은 서산서원이 '어이~ 추워'하며 뾰쪽한 봉오리를 꼭꼭 닫은 목련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이곳은 단종이 폐위되자 어계가 고향으로 내려와 숨어 살던 곳이다.

 

안내자료에 따르면 이 서원은 영남에 있던 유학자들이 어계와 함께 생육신을 길이 모시고자 세웠다. 서기 1703년 숙종 끝자락에 세워진 이 서원은 1713년에서야 '서산서원'이란 제 이름을 내걸었다. 서산이란 이름은 동쪽에 백이산이 있고, 생육신 절개가 은나라 백이, 숙제에 버금간다는 뜻에서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 정책으로 한동안 그 모습이 사라졌던 이 서원은 116년이 지난 1981년에 정부 보조와 후손들 성금으로 고쳐 짓기 시작해 1984년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가까이 다가서자 서산서원 대문에 커다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다. 어쩔 수 없다. 하긴, 이번 여행길은 어조대와 고마암을 자세하게 둘러보는 것이 아닌가.  

 

그 집에 가면 어계 혼백이 꺼이꺼이 우는 곡소리가 들린다

 

채미정과 어계 옛집 허름한 기와집은 채미정과 어가고택이고, 정자는 청풍대다 .
채미정과 어계 옛집허름한 기와집은 채미정과 어가고택이고, 정자는 청풍대다 .이종찬
▲ 채미정과 어계 옛집 허름한 기와집은 채미정과 어가고택이고, 정자는 청풍대다 . ⓒ 이종찬

서산서원을 뒤로 하고 천천히 걸어간다. 저만치 지붕에 마른 낙엽이 수북이 쌓인 허름한 기와집 몇 채가 300년 묵은 은행나무를 파수꾼처럼 앞세우고 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에도 자그마한 정자 하나가 늘 푸른 소나무 숲에 파묻혀 고개를 우쭐거리고 있다. 허름한 기와집은 채미정과 어가고택이고, 정자는 청풍대다. 

 

손을 내밀어 안으로 잠긴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건물 마루와 바닥에도 온통 마른 이끼가 깔려 있어 으스스하다. 채미정이란 글씨가 매달린 정자 양쪽에는 흰 글씨로 '백세'(百世) , '청풍'(淸風)이란 한자가 씌어져 있다. 채미정 앞을 휘돌아 흐르는, 연못인지 도랑인지 헛갈리는 꽁꽁 언 얼음 속에도 썩어가는 물이끼가 잔뜩 끼어 있다.

 

금세라도 여기저기서 유령이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어계 옛집을 착잡한 마음으로 둘러보고 있을 때, 담벼락 뒤에서 기차 경적소리가 요란스레 울린다. 언뜻 귀를 찢는 듯한 그 기차 경적소리가 초라하게 버려진 옛 집을 한스럽게 둘러보는 어계 혼백이 꺼이꺼이 우는 곡소리로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채미정과 어계 옛집을 뒤로 하고 철길 저 너머 바라다 보이는 어조대와 고마암이 있는 물가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오늘따라 이마와 목덜미를 휘어 감는 칼바람이 더욱 매섭다. 하지만 이 매서운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지 바른 논둑 곳곳에는 연초록 풀들이 쑤욱쑥 솟아나 쥐빛으로 말라붙은 세상을 비웃고 있다.

 

어조대, 고마암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멘트 다리

 

어조대와 고마암 이곳은 어계가 단종 폐위에 반대하며 고향으로 내려와 낚시질을 하며 시름을 낚았던 곳이다.
어조대와 고마암이곳은 어계가 단종 폐위에 반대하며 고향으로 내려와 낚시질을 하며 시름을 낚았던 곳이다.이종찬
▲ 어조대와 고마암 이곳은 어계가 단종 폐위에 반대하며 고향으로 내려와 낚시질을 하며 시름을 낚았던 곳이다. ⓒ 이종찬

고마암 고마암 위에 새겨진 저 글씨 '백세청풍'은 처음 누가 새겼을까.
고마암고마암 위에 새겨진 저 글씨 '백세청풍'은 처음 누가 새겼을까.이종찬
▲ 고마암 고마암 위에 새겨진 저 글씨 '백세청풍'은 처음 누가 새겼을까. ⓒ 이종찬

깎아지른 층층이 절벽이 불에 타다 만 책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어조대. 이곳은 어계가 단종 폐위에 반대하며 고향으로 내려와 낚시질을 하며 시름을 낚았던 곳이다. 근데, 지금은 흐르는 물이 너무 얕고, 개울 곳곳이 바싹 말라붙어 있어 낚시는커녕 피라미 한 마리조차도 잡기 어려워 보인다.

 

겨울가뭄. 그래, 아까 지나치는 길에 만난 60대 초반으로 보이던 마을 아주머니 말로는 "지금 이곳 남녘에는 때 아닌 겨울가뭄이 계속되고 있어 먹는 물조차 귀하다"고 하지 않던가. 얕은 물이 허연 살얼음으로 얼어붙은 어조대. 깎아지른 절벽 한가운데 '백세청풍'이란 하얀 글씨가 새겨진 저 바위가 고마암이다. 

 

고마암 깎아지른 절벽 한가운데 '백세청풍'이란 하얀 글씨가 새겨진 저 바위가 고마암이다.
고마암깎아지른 절벽 한가운데 '백세청풍'이란 하얀 글씨가 새겨진 저 바위가 고마암이다.이종찬
▲ 고마암 깎아지른 절벽 한가운데 '백세청풍'이란 하얀 글씨가 새겨진 저 바위가 고마암이다. ⓒ 이종찬

어조대 거기 깎아지른 바위 위에도 서산서원을 뜻하는 '서산'(西山)이란 큼지막한 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어조대거기 깎아지른 바위 위에도 서산서원을 뜻하는 '서산'(西山)이란 큼지막한 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이종찬
▲ 어조대 거기 깎아지른 바위 위에도 서산서원을 뜻하는 '서산'(西山)이란 큼지막한 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 이종찬

누군가 하얀 페인트로 덕지덕지 덧칠해 첫눈에 보기에도 민망스러워 보이는, 고마암 위에 새겨진 저 글씨 '백세청풍'은 처음 누가 새겼을까. 어계가 직접 정으로 바위를 쪼아 새겼을까. 어계가 이곳에서 낚시질을 할 그 무렵에는 이 개울에 거울처럼 맑은 물이 가득 차 고마암 허리춤까지 출렁였을까.  

 

야트막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오밀조밀 웅장한 어조대, 고마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멘트 다리를 지나 어조대 오른 편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간다. 거기 깎아지른 바위 위에도 서산서원을 뜻하는 '서산'(西山)이란 큼지막한 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자잘한 글씨들이 세로로 씌어져 있다.

 

무슨 뜻일까. 가까이 다가서서 글씨를 읽어보려 했지만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 위에 새겨진 한자가 지닌 속뜻을 알기는커녕 글씨조차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근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글씨 바로 옆에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 연꽃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불상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폭압정권에 저항한 사람들 흔적은 지워버리고 싶은 것일까

 

어조대 그 글씨 바로 옆에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 연꽃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불상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어조대그 글씨 바로 옆에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 연꽃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불상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이종찬
▲ 어조대 그 글씨 바로 옆에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 연꽃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불상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 이종찬

누가 왜 이 바위 위에 불상을 새겼을까. 언뜻 '백세청풍'에 얽힌 옛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 한 선비가 용한 무당에게 '백세청풍'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 부적을 받아 몸에 지닌 채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근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어 순식간에 배가 기우뚱거리며 강물로 엎어지려 했다.

 

그때 선비가 몸에 지니고 있던 '백세청풍'이란 부적을 꺼내 마지막 글씨인 바람 '풍'(風)자를 떼내 강물에 적셔 비벼 버렸다. 순간 바람이 그치고 강물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위태로운 벼랑 바위 위에 새겨진 저 선각불도 바람 '풍'(風)자가 어계 혼백이 되어 떨어져 나와 그대로 불(佛)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각불을 오래 바라보다가 어조대 왼 편으로 끝까지 휘돌아 나가자 거기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가는 비좁은 비탈길이 놓여 있다. 그 끝자락에 자그마한 암자가 하나 오도카니 엎드려 있다. 그래. 어쩌면 어조대 바위 한 귀퉁이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선각불은 이 암자에 있는 수도승이 새긴 것인지도 모른다.

유학자 어계와 선각불. 잔머리를 굴려 아무리 적당히 끼워 맞추려 해도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서로 엇박자를 낸다.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 수많은 물음표를 저만치 암자에 있는 수도승에게 물어보려고 기를 쓰고 비탈길을 올라 암자에 다가섰지만 아뿔싸 암자는 텅 비어 있다.

 

어계 조려 선생 발자취가 서려 있는 어조대와 고마암. 위태롭게 깎아지른 벼랑이 아름다운 선경이요, 생육신이었던 어계 조려 선생 삶까지 깊이 서려 있는 이 소중한 곳이 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고 내팽개쳐져 있는 것일까. 폭압정권에 저항한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은 역사라는 한 페이지에서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권력을 움켜쥔 자들 검은 심보일까.

 

어조대 이 사진에서 선각불을 찾아보세요.
어조대이 사진에서 선각불을 찾아보세요.이종찬
▲ 어조대 이 사진에서 선각불을 찾아보세요. ⓒ 이종찬

덧붙이는 글 ☞가는 길/서울-마산-진동-함안 군북-서산서원-채미정-하림리-어조대-고마암
 
#어조대 고마암 #어계 조려 #함안 군북 #서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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