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1일 밤샘 시위에 참가했다 경찰에 붙잡힌 한홍구 교수는 당시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국민 엠티(MT)였다"고 말했다. 사진은 '경제파탄 이명박 OUT'이 적힌 종이와 촛불을 들고 있는 한 시민.
권우성
- 2008년, 다사다난한 가운데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는 빠질 수 없는 것 같다. 교수님도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하룻밤 기거(?)하셨는데?
"(웃음) 수업듣는 대학원 학생들, 가족들과 촛불집회 많이 나갔다. 그날도 그 팀들이랑 같이 잡혀갔고. 최종 결정된 건 아니지만 검찰이 벌금형을 구형했다. 세 명은 200만원, 전과 있던 이들은 250만원. 벌금은 낼 수 없고 정식 재판을 청구할 거다. 정식재판에서 벌금형이 떨어져도 낼 생각은 없다. 노역장 유치가 떨어져도 할 수 없다."
-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국민MT"라고 표현한 게 촛불집회를 정의하는 명언이 됐다."우연찮게 불쑥 나왔던 말인데 어떻게 그렇게 됐다. 그날 길바닥에 있으면서, 과연 한국전쟁 때 빼고 이렇게 많은 이들이 길에서 새벽을 맞이한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눈에 보이더라."
- '국민MT'라는 명언도 있지만, 이후 강연에서 촛불집회를 일러 "민주화운동이 곗돈을 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2008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느끼시는 바는 어떠신가. "곗돈은 탔지만 돈은 항상 부족하달까(웃음)? 촛불집회가 기대하지 못했던, 민주화운동의 저력 혹은 결과로서 나올 수 있는 부분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지 않았다면 그런 반응은 절대 나올 수 없었다. 정작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쳤던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성과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그런데 민주화의 공기 안에서 살아온 이들은 우리와 달리 침탈당하자 온 몸으로 반응했다. 그 때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 지금에 와서 봤을 때 촛불집회가 기대했던 것 이상 나아가지 못한 부분도 있지 않나.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확산된 촛불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나도 동력이 거의 못 옮겨갔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벌써 촛불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기엔 이르다. 지금도 촛불은 현재진행형이고 잠복기다. 예를 들어 우리가 3·1운동이나 광주 민주화 항쟁을 지금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광주 민주화 항쟁만 하더라도 사실 그 자체로 볼 때 진압된 운동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이야기할 순 없다. 광주가 80년대를 살아간 힘이고 6월 항쟁을 만든 밑거름이었기에 '살아있는 운동'이다. 촛불만 하더라도 참가했던 수십만의 경험이 다 다른데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본다.
현상적으로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는 거다. 역사상 이 정도로 동원되지 않은 인원이 모인 적이 있던가 싶다. 그러나 전 국민이 참여한 것은 아니다. 1백만명으로 대략 계산해도 전 국민 중 약 2%? 예전 정통성이 없었던 정부와 싸울 땐 2%만으로 충분했는데 선거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이명박 정부에게 2%는 부족했다. 어떤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촛불은 참 멋있는데 그걸로 밥을 지을 수 없진 않냐'고."
- 생업을 포기하고 계속 촛불을 들고 있는 이들도 있다. 촛불집회의 기억이 인생에 변화를 줄 정도로 강력한 경험이 된 셈이다. 정부 역시 이후 내놓은 대책들만 보더라도 굉장히 놀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정부가 굉장히 데었다. 집권 초기에 500만표 차이로 이겼다고 기고만장하다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수구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된다. 한미 쇠고기 협상이 그렇게 된 것도 이명박정권의 수준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이후 대응을 보더라도 지금 이 정권의 행동은 일제보다 못하다. 그 흉악한 일본 놈들도 3·1운동 이후 유연하고 능란하게 대응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만들어졌고, 조선 사람들에게 여유를 줬다. 해외로 망명했던 3·1운동 주도자들이 1·2년 뒤 돌아왔을 땐 종로서에서 반나절 정도 형식적으로 어물어물한 뒤에 수사를 종결해 버렸다. 그렇게 조선사람들 숨막히지 않게 풀어주는 '문화정치'를 했기 때문에 몇십년을 더 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정치는커녕 유모차 끌고나온 엄마들한테 '아동학대죄'라고 막말을 해댄다. 이거 말하다 보니 일본 놈들을 칭찬하는 것처럼 돼 버렸다(웃음)."
"새해엔 역사·교육 이념공세 더 세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