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을 위한 동화] 베스

붕어들만 저수지에 평화가 왔다고 기뻐합니다

등록 2008.12.31 10:52수정 2008.12.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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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 조용한 저수지에 물고기 나라가 있었습니다. 긴 수염과 큰 입은 가진 메기는 호시탐탐 저수지를 노리는 물뱀과 개구리떼의 습격을 언제나 앞장서서 막아 왔습니다. 지금처럼 저수지가 깨끗하고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메기의 몸을 아끼지 않은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수지의 왕이었던 잉어는 메기의 구국충정을 헤아려 메기에게 대장군의 칭호를 내렸습니다. 권문세족인 붕어들이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메기의 독주에 심기가 불편했지만, 자신들의 말을 잘 들으며 저수지를 지켜 줄 마땅한 대안도 없었습니다. 물론 저수지에는 메기와 힘을 견줄만한 쏘가리와 가물치가 있었지만, 이 물고기들은 첩첩산중 바위와 진흙 속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수지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물고기가 나타나 물고기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큰 입을 가진 물고기는 '베스'라고 불리는 낯선 외래종이었습니다. 베스는 순식간에 저수지 이곳저곳을 점령하며 닥치는 대로 물고기를 해쳤습니다. 저수지 외곽에서 개구리떼의 습격을 막던 동자개 장군이 지느러미 하나가 떨어져 나간 채 잉어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현장 상황을 알립니다.

 

"전하! 지금 외곽에 있던 성들이 베스라 불리는 외래종에 속속 무너지고 있습니다. 속히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동자개는 울면서 잉어에게 하소연합니다.

 

"속히 메기 상장군이 출동해야 합니다. 지금 저수지는 바람 앞에 등불입니다."

붕어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잉어에게 고합니다.

 

"하지만 전하! 제가 출격하기 전에 일단 베스라는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포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적을 알아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메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왕에게 고합니다.

 

"장군! 지금 나라가 이토록 위급한 데 언제 적을 파악해서 공격한단 말이요. 지금 당장 나가서 베스의 목을 가져오시오."

붕어들은 혹 자신들이 다칠세라 다급하게 말합니다.

 

"전하! 빨리 메기장군을 전장에 보내어 이 나라를 구하게 하소소."

붕어들이 머리를 쪼아리고 잉어에게 읍소합니다.

 

"대신들이 하나같이 빨리 나가라고 하니 메기는 그렇게 하라."

"전하! 무작정 나가 싸울 것이 아니라 저에게 이길 방도를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요."

메기가 잉어에게 읍소하자 가장 높은 권력을 갖고 있는 떡붕어가 벼락처럼 화를 냅니다.

 

"전하! 지금 메기가 전하에게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당장 싸우러 나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참수해야 마땅합니다."

떡붕어의 말에 붕어들이 모두 "옳소"를 외치며, 메기장군을 째려보며 빨리 나가라고 합니다.

 

메기장군은 왕과 신하들의 강요에 할 수 없이 베스가 있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쇠한 메기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포악한 베스를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메기는 베스에 의해 처참하게 폐허가 되어버린 성을 보며 깊은 한 숨을 쉬었습니다.

 

여기저기 베스에게 물리고 상처 입은 물고기들이 바닥에 즐비합니다. 메기가 상처받은 물고기를 둘러보며 시름에 잠겨 있는 사이, 엄청난 크기의 입을 가진 베스가 나타났습니다. 베스는 생각보다 훨신 몸이 컸습니다.

 

베스는 단번에 메기를 잡아먹을 듯이 다가 왔습니다. 노쇠한 메기는 있는 힘을 다해 베스에게 저항해 봤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베스의 공격에 메기는 꼬리가 잘리는 큰 부상을 입고 후일을 도모하며 가까스로 궁궐로 쫒겨 왔습니다. 메기장군의 패배는 충격이었습니다.

 

궁궐 밖에서는 베스의 공격에 피라미와 납자루가 수도 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붕어는 빨리 피해야 한다며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때 노쇠한 떡붕어가 한마디합니다.

 

"어서 비단바위 밑에 사는 쏘가리를 데려와야 합니다. 바깥 상황이 위험하니 장군이 쏘가리를 데리고 오시오. 어서 출발하시오."

 

메기는 몸이 잘 움직여 지지 않았지만 아픈 꼬리를 부여잡고 저수지의 물고기를 구해야겠다는 구국충정으로 비단바위로 향했습니다. 쏘가리는 메기를 보자 황급히 바위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메기는 쏘가리를 향해 저수지가 베스의 습격으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으니 어서 베스를 물리쳐 달라고 하소연 했습니다.

 

"당신은 저수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의 안일만 챙기는 잉어와 붕어를 위해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는가? 나는 그들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니 물러가시오."

쏘가리의 목소리가 바위틈에서 쩌렁쩌렁 울립니다.

 

"쏘가리! 난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저수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 저수지를 위해 일평생 살아왔소. 지금 베스라는 외래종이 저수지의 물고기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니 자네에게도 곧 그 위기가 닥칠 것이요. 이 저수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 또한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소. 어서 그 놈을 물리쳐 주시오."

메기의 간곡한 부탁에 쏘가리가 드디어 바위에서 나옵니다.

 

"미련하고 우직한 메기 같으니라고. 내 잉어와 붕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의 그 마음을 높이여겨 나가갔네. 하지만 앞으론 그렇게 살지 말게나."

 

쏘가리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비호처럼 물길을 가르고 궁궐로 향합니다. 쏘가리는 베스를 기다렸다는 듯이 질풍노도처럼 달려들었습니다. 베스의 날카로운 공격에 쏘가리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베스와의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쏘가리가 베스의 큰입에 턱이 물리더니 힘없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베스는 쏘가리를 이겼다는 승리감에 취해 포효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메기는 차마 쏘가리 근처에 가지 못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 궁궐로 돌아가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붕어들는 쏘가리의 죽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베스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쳐 온 메기를 무능력한 물고기라며 저런 물고기를 상장군으로 대접한 게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메기는 붕어들에게 "너희들은 저수지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당장 베스를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붕어들은 왕인 잉어도 내팽겨 친 채 피라미와 납자루의 보호를 받으며 궁궐을 떴습니다. 잉어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상징적인 존재로 모든 권력은 권문세족인 붕어에게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때 메기가 뭔가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메기! 너 마저 정녕 내 곁을 떠나는가?"

"전하! 소신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가물치라면 능히 베스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물치? 그는 성질이 포악해서 우리에게도 적대적인 물고기가 아니던가? 그런 물고기가 우리를 도와 주겠는가? 아- 희망이 없구나."

"그러나 가물치도 우리 저수지의 물고기이니 능히 외래종의 침입에 나설 것입니다. 제가 데리고 올테니 그때까지 옥체를 보존하소소."

 

메기는 호위무사 은어에게 잉어를 부탁하고 저수지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침침한 암흑은 어떤 물고기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음산함을 풍겼습니다.

 

메기는 간절하게 가물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가물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메기는 좌절했습니다. 남아 있는 물고기는 베스의 노예가 되어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베스에게 물린 상처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과 저수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메기의 정신이 아련해지더니 바닥으로 서서히 떨어집니다. 바로 그 순간 메기의 몸이 묵직한 무언가에 들려 수풀 위에 얹혀 집니다. 찬찬히 눈을 떠보니 바로 애타게 찾던 가물치입니다.

 

"그대도 소식을 들었겠지만, 지금 저수지가 베스라는 외래종의 침입으로 쑥대밭이 되었소. 가물치!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내가 그대를 구해준 건 그 나마 왕궁과 이곳 진흙에 살고 있는 나와의 소통을 위해 애써온 그 옛날 나와의 친분 때문이요. 그대의 우직함이 나를 진흙 속에서 불러왔소."

 

"가물치! 우리가 그대를 배척한 것은 당신이 두렵기 때문이었소. 그대도 알다시피 붕어들은 당신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오. 그러나 그대도 이곳 저수지에 살고 있으니 같은 동료이고 가족이요. 이제 저수지는 당신 손에 달렸소. 내 마지막 부탁이니 도와주시오."

뼛속까지 스며든 상처로 메기는 정신을 잃어갑니다.

 

"이보시오! 메기! 정신 차리시오!"

"난 참 바보처럼 살았소.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난 이렇게 했을 거요. 희생없이 평화는 찾아오지 않고, 누군가는 그렇게 해야 … 가물치! 부탁하오."

가쁜 숨을 내쉬는 메기의 튀어나온 눈자위에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가물치의 눈을 보며 눈을 꿈뻑 거리더니 숨을 거둡니다.

 

가물치는 저수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메기의 충정을 받아들이고 궁궐로 향했습니다. 궁궐은 베스에 의해 엉망이 되었고 잉어가 베스 앞에 머리를 쪼아리고 있었습니다. 가물치를 본 베스가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가물치의 갑작스런 출현에 잉어가 놀랍니다.

 

베스가 단숨에 가물치를 공격합니다. 가물치가 긴 꼬리로 베스의 머리를 섬광석화처럼 치더니 한 입에 베스의 몸뚱아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베스가 고통에 몸을 파르르 떨더니 미동조차 없습니다. 가물치가 입가에 베스의 피를 묻힌 채 잉어에게 다가가자 잉어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저수지를 지키기 위해 한평생 몸 바쳐온 메기가 죽었소. 난 메기가 바보 같소. 당신은 메기가 당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하지만, 메기는 당신들보다 저수지와 여기 사는 물고기들을 더 사랑했소. 부디 메기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로겠소."

 

공포에 떨고 있는 잉어를 뒤로 하고 가물치는 다시 저수지 밑바닥 암흙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베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붕어들이 다시 궁궐로 모여 들었습니다. 수많은 피라미와 납자루의 죽음도 아랑곳없이 붕어들은 베스 덕분에 메기가 죽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붕어들은 한 마리도 희생자가 없었습니다. 베스를 막기 위해 모질게 싸워온 피라미와 납자루의 희생에 대한 위안도 없이 붕어들은 서둘러 궁궐 재건을 위해 다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물치가 진흙 위로 올라오는 일이 없도록 죽은 피라미와 납자루는 저수지 바닥에 던졌습니다. 붕어들만 저수지에 평화가 왔다고 기뻐합니다.

덧붙이는 글 | 고생많으셨습니다. 수고하세요

2008.12.31 10:52ⓒ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고생많으셨습니다. 수고하세요
#성인동화 #베스 #메기 #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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