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중국여행중 찍은 장가계 산 정상 난간대에 걸려있는 열쇠들이곳을 찾은 연인들은 자물쇠통을 난간에 채우고 열쇠를 절벽밑으로 버린다고 한다. 둘만의 사랑을 꼭꼭 채우고~~영원히 풀리지 않길 바라며~~
백재승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기적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난 어느 정도 체념 상태에 들어갔다. 아무리 들이대도 대답 없는 그녀가 야속하기도 했고, 그런 내가 한심하기도 했다. 물론 그녀에 대한 마음은 변함 없었다. 다만 예전처럼 불도저 모드로 밀어붙이기에는 힘이 상당히 빠진 상태였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나는 같은 솔로족인 친구들과 소주를 기울이며 우리만의 소박한 위로를 즐기고 있었다. 주변 교회에서는 캐롤송이 울려 퍼지고 길거리에는 연인들로 보이는 남녀들이 꼬옥 부둥켜 앉은 채 지나가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안주(?)삼아 신세 한탄 한번에 소주 한잔을 절묘하게 섞어서 인생의 쓴맛을 맛보고 있었다.
다음날 난 집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느때 같으면 그녀에게 전화를 했겠지만 '아마 어디서 친구들과 놀고있겠지'라는 생각에 애써 자제했다. 이런 날까지 귀찮게 하기에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서글픔이 너무 컸던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기적은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도둑처럼 찾아온다"고, 정말이지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나에게도 찾아왔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있던 나에게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받을까? 말까?' 당시 나는 상대편 전화번호가 찍히는 서비스도 사용하지 않아 일단 휴대폰을 받아야 만이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혹시나 '술이나 먹자'라는 아는 이들의 전화일까 봐 귀찮은 마음부터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몰라도 그런 날은 술친구들도 귀찮았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은 내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아저씨 뭐해요?" 그녀였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갑자기 화가 났다.
"뭐하기는, 그냥 텔레비전 본다." "아저씨도 참 청승이다.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뭐 하러 그러고 있어요?" 정말이지 얄밉기 그지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누군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런가, 나도 너랑 같이 즐겁게 보내고 싶단 말이다.
"아저씨, 오늘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요. 밖에 봐요. 눈 많이 왔죠?" 그녀의 말에 난 창 밖을 쳐다봤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린 듯했다. 잠깐 멍한 표정으로 눈 구경을 하던 내 귓가로 그녀가 말했다.
"아저씨, 나 아저씨 사는 동네 왔는데, 거기 무슨 아파트에요?" 순간 난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나는 심드렁한 음성으로 받아쳤다. "나 오늘 슬프다. 장난치지 마라"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그동안의 현실이 너무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말은 나를 너무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파트라고 한 것 같은데, 저기요, **아파트로 가주세요." 그녀는 택시기사에게 말을 건네는 듯 보였다. 순간 난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여기 온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녀가 여기를 올 수 있단 말인가… 난 허겁지겁 얇은 체육복만 걸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굳어진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정말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우리 아파트 앞에 와 있었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가 서 있었고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 "반갑죠?" 말없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에게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밖으로 눈은 예쁘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를 춥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딱히 돈도 없고, 갈 데도 없던 나는 그녀를 데리고 몰래 아버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아버지는 퇴근하신 후였고, 난 열쇠는 없었지만 아버지 사무실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진작에 숙지(?)한 상태였다.(아버님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사무실 불은 켜지 않고 난롯불만 작동 시켰다.
"아저씨 나 피곤해요."
그녀는 놀랍게도(?) 내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대고 누웠다.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손 한 번 잡기도 그렇게 힘들었던 그녀의 돌발행동에 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내 무릎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난 머릿속이 멍해져 바보모드로 들어가고 말았다. 분명히 도란도란 무슨 대화를 나누고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딱 한마디는 기억난다.
"아저씨, 세상에 아저씨 같은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으면 난 미쳐버릴 것 같아." 난 뭐라고 대답해야될지 몰라 그냥 "으응"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아저씨 나 차시간 다됐다." "응, 그…그래?" 난 잠깐의 꿈같은 시간을 뒤로 한 채 엉거주춤 일어났고, 그런 나를 향해 그녀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아저씨 나 한 번만 안아줄 수 있어요?"라는 말은 건넸다. 그녀의 갑작스런 태도변화에 난 당황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그런 내가 웃겼는지 그녀가 웃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오자 사방에는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쳤다. 그녀는 완전히 내게 밀착해서 걸었고 우리는 마치 한 몸이 된 듯 서로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워낙에 가슴이 불타고 있었던지라 날카로운 눈보라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녀를 버스에 태워서 보내고 집에 돌아온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밤늦도록 엉거주춤한 기색으로 방안을 빙빙 돌았다. "왜 그려? 요새 만나는 가시네가 너 싫대?" 그런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할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니, 전혀 아니야" 강하게 도리질을 한 나는 계속 그렇게 밤새도록 히죽히죽 웃고 다녔다. 다음날 그녀에게서 한통의 이메일이 왔다. 마치 자신에게 쓰는 일기 같은 내용이었다.
'전 크리스마스를 무척이나 기다리며 나름대로 뭔가 특별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나 않을까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엔 감기몸살로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쓸쓸한 크리스마스도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꺼란 생각을 해봤지만… 아마도 그건 저에겐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나 봅니다... 쓸쓸한 크리스마스가 너무 싫었으니까요... 황금 같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그냥 보내버린 게 아쉽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날도 전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아침부터 기분이 너무나 쳐져있던 터라 맘이 많이 울적했습니다... 하루가 점점 저물어가면서 전 문득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그곳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6시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무작정 터미널로 갔습니다...전 그곳에 가서 그와 연락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든... 어디서든... 내가 손을 내밀면 내게로 달려올 꺼라 믿었으니까요... 그가 살고 있는 그곳에 내렸을 땐... 낯선 곳임에두 불구하고 왠지 설레기만 했습니다... 때마침 눈까지 날리고 있었으니까요...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여러번 되물었습니다... 정말이냐고..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난 가로등 아래도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며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세상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순간 만큼은 나에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으니까요. 그는 급하게 나왔는지 얇은 츄리닝 차림이었습니다... 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반갑게 맞아주는 그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 후 그와 난 조그만 난로불 앞에서 이얘기 저얘기 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정말로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 세상에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이유 없이 너무나 다정하게 맞아주는 단 한 사람... 그가 진실로 고마웠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아직은 따뜻하다는 걸 느꼈고 그로 인해 삶에 위로를 얻었으며 그로 인해 난 삶의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전 그에게 아무것도... 어느 것 하나도 줄게 없는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전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걸 받았습니다..그도 언제까지나 저에게 그렇게 따뜻한 포근함을 줄 수는 없겠지만... 전 오랫동안 그의 편안한 미소를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여자는 정말 신기한 존재다. 어제까지만 해도 벽처럼 느껴지는 존재가 다음날 엄청나게 친근한 대상으로 확 바뀌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이후 그녀는 정말 나에게 잘해줬고, 난 그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마음의 위안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내게 부모님 이상의 존재였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옆에 없었다면 마음의 충격을 견디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그녀와 나는 이별하고 말았지만, 그 날의 따뜻했던 크리스마스는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고 있다. 내 마음 속까지도 하얗게 빛나게 했던 꿈 같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덧붙이는 글 | ☞ 다음호 예고: '성적매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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