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친정집의 고즈넉한 가을 풍경.
김현숙
1년 뒤, 이번엔 골수암이... 죽을 준비를 하다육체는 가랑잎처럼 말라버린 데다가 너무도 아프고 통증이 깊어서 이제는 조용히 나의 때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물론이었지만 남편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그래서 검사결과를 보러 가던 날,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동안 고단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내 영혼과 육체가 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싶어 편안했다.
그래서 모든 것 감사하며 편안하게 내려놓고 미련도 후회도 애착도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집 떠나기 전날 저녁, 그동안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준 하늘의 영광과 자비와 사랑에, 그리고 한없는 위로와 사랑을 베풀어준 땅의 사람들에게 눈물로 마지막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의사 앞에 앉았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그토록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나의 병명은 암세포가 척추를 공격하는 골수암이었다. 나는 늘 가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거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내 역할은 끝났으니 더 이상 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의사가 권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이제 할 일 다 했고, 내 수명도 다 했으니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고생시켜가면서까지 수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인 항암치료를 거부하는 내게 남편은 왜 혼자 생각만 하느냐고, 남은 가족들이 받을 고통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나무랐다. 아이들은 엄마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곁에 오래 존재해 주기만을 소망했다. 이런 가족들들 두고 끝까지 내 생각만을 고집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건 우리가 오랜 기간을 함께 피와 살을 나누며 동고동락해온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수십년지기 담배도 끊고 항암치료에 함께한 남편과 아들내가 항암치료를 시작하던 날, 남편과 아이는 50년, 10년 동안 피워온 담배를 끊었다. 그들의 이 금연 의지는 이후 투병하는 내게 굉장한 에너지를 주었다. 암세포가 이미 먹어 버린 척추를 세 번 시술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건 죽음보다 더 무서웠다. 그러고 나서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는 독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혼자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침대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아들이, 남편이 떠 넣어주는 밥을 받아먹었다. 그건 밥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눈물을 삼키며 한 술 한 술 받아먹었다. 밥 먹기가 그리도 힘들었지만 꺼져가는 나를 살려내기 위해 고생하는 그들에게 보람을 주기 위해 한술이라도 더 받아먹으려고 애썼다.
남편이 주는 밥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으나 아들이 주는 밥은 그야말로 눈물 덩어리였다. 어린아이처럼 누워서 자기가 떠넣어주는 밥을 받아먹는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아이는 내게 눈물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고맙기 그지없다. 이런 나를 지켜보아야 했던 가족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삼키고 또 흘린 눈물은 그 얼마였을까?
그들의 눈물겨운 소망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모든 것을 참아내자 내 몸은 기적처럼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가족의 힘은 위대했다. 내 곁에 24시간 붙어서 그들은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해낸 것이다. 빨래 한 번, 청소 한 번, 밥 한 번 해보지 않았던 남편은 지금 힘들게 간병과 집안일을 혼자서 해내고 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안쓰럽기 그지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모든 정성을 다하는 그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으면 미안하고 고마워서 늘 속울음을 울었다. 그래서 투병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이겨내야 했다. 너무 힘들어 좌절 속으로 떨어질 때마다 가족들은 나의 마지막 잎새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그 무섭고 지독한 항암제보다도 몇 십 배의 효력이 있고 부작용 없는 항암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