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심하게 생각하면 폐광에 방치된 철제들이 지하수에 침식되면서 녹물이 흘러서 그런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정암사로 들어가는 계곡의 바닥은 붉은 팥죽 색깔이었습니다.
한겨울 중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적멸보궁에서 기도를 올리는 몇몇 사람들의 기척만 있을 뿐 정암사 경내는 한적합니다. 주변이 조용하니 적멸보궁 안에서 울려 나오는 독경소리가 풍경소리만큼이나 맑고도 또렷하게 들립니다. 독경소리가 흘러나오는 적멸보궁 뜰에서는 스님 한 분이 팔짱을 낀 채 포행이라도 하듯 느릿한 걸음으로 맴돌고 있습니다.
한겨울의 스산함으로 이미 산자락까지 스며들었던 한기가 적멸보궁에서 울려나오는 독경소리와 또박또박 걷고 있는 스님의 발자국소리에 시나브로 잦아듭니다. 자장율사의 주장자였다는 주목나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도에 지장이 될 만큼 목소리가 커지는 갑론을박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정말 기도에 훼방꾼이 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적멸보궁을 나와 극락교를 건너서 수마노탑으로 올라갑니다. 비탈졌지만 위험하지 않고, 돌계단이지만 험난하지 않는 산길을 걸어 수마노탑까지 올라갔습니다. 수마노탑에서 내려다보는 정암사 경내는 침묵중이고, 정암사를 품고 있는 산세와 계곡은 묵언중입니다.
어묵동정 행주좌와, 말하고 있거나 침묵하고 있거나, 움직이고 있거나 멈춰 있거나, 걷고 있거나 멈춰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오로지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수마노탑을 향해 서 있을 뿐 침묵하고 묵언할 뿐 산천은 청아하고 강산은 조용합니다.
강산은 변하면서도 침묵하고, 세월은 흐르면서도 묵언인데 잠시도 한 치 혀를 가만히 두고 있지 못하는 자화상이 보였습니다.
수마노탑에서 느꼈던 묵직한 침묵을 뒤로 하며 구불구불한 산줄기를 넘어 동해에 있는 묵호로 갔습니다.
원님 덕분에 나팔 좀 불자
얼었던 땅이 녹으며 시작된 농사일에 해수욕은커녕 짭짜름한 바다 냄새 한 번 제대로 맞지 못했는데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고, 친구 놈 늦장가 가는 덕분에 바닷바람이나 쐬고 가자는데 의기투합에 동해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같은 강원도지만 태백에서 바다까지는 거반 1시간쯤이 걸리는 거리. 동행하는 친구들이 있고, 어울린다는 여유가 있으니 문제 될게 없었습니다. 고개를 넘고, 구불구불한 산모롱이를 돌아 찾아간 묵호항 역시 한겨울의 싸늘함입니다.
한겨울 평일 늦은 오후라서 그런지 시끌벅적할 거라고 생각하였던 어시장은 조용합니다. 손님을 맞은 아낙들의 손길은 분주한데 찾아주는 이 별로 없으니 짝사랑 같은 분주함이고, 이별주 같은 조용함입니다.
바닷바람을 쐬며 바닷가로 나가던 친구가 빨리 와보라고 손짓을 합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부둣가로 가보니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방파제 아래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해야 할 만큼 손가락 크기의 고기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손만 짚어 넣어도, 뜰채만 넣었다 꺼내도 최소한 몇 마리는 건져 올릴 만큼 바글바글 합니다. 민물고기를 잡겠다고 냇물로 펼쳐 던지던 투망쯤이라면 단 한 번에 최소 수백 마리는 잡힐 만큼 많았습니다. 어떤 고기인지, 먹을 수는 있는 고기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저 바닷바람을 쐬며 엄청난 수의 고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좋아들 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고기떼를 구경하고 있는데 저만큼서 한길 크기의 낚싯대로 고기를 잡는 게 보입니다. 환갑은 지났을 어르신 한 분이 추와 낚싯바늘만 몇 개 달린 낚시로 고기를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물 반 고기 반으로 보일만큼 부둣가로 몰려 든 고기들은 집나간 며느리도 찾아오게 할 만큼 고소한 맛을 낸다는 전어새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전어새끼들을 일반적인 방법의 낚시가 아닌 훌치기로 잡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수풀을 헤집고 나가다 보면 저절로 수풀에 걸리듯 바글바글한 고기떼 사이로 낚시를 집어넣었다 조금 빠른 속도로 ‘휙’하고 올려 채면 낚싯바늘에 고기가 걸려오는 방식이었습니다.
낚싯바늘이 한 개가 아니라 대여섯 개쯤이 달렸으니 한꺼번에 서너 마리가 옆구리나 지느러미가 걸려 달려 나오기도 합니다. 관광객으로 보였던 사람들은 그렇게 잡혀 올라온 고기를 손으로 떼어내고 있었지만 주변에 살고계시는 듯 보이는 어르신은 노련한 솜씨로 낚싯바늘에는 손가락 한 번 대지 않고 낚싯줄을 잡고 툭툭 털어내는 방식으로 쉽게 고기들을 떼어냅니다.
바닷가에 살면서, 자주자주 그런 낚시질을 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어르신만의 노하우인가 봅니다.
태양이 태백준령을 넘으니 묵호항에도 한겨울의 어스름이 내려앉습니다. 원님 덕분에 나팔 좀 불거라고 찾아온 바닷가에서 전주곡 같은 바닷바람을 실컷 쐬었으니 주곡을 연주하듯 푸짐하고도 멋들어지게 차려진 바닷가 음식으로 저녁 한 끼를 해결합니다.
내년 이맘때쯤, 잭팟 터지듯 신혼첫날밤 둥이 소식 왕창 들려오길
살갗을 스치던 바닷바람은 덕분에 불고 있는 나팔소리의 전주곡이었고,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고 있는 싱싱한 회 한 점에서 느끼는 바다 맛은 농한기에도 짬을 내야 할 만큼 바쁘게 살고 있는 농사꾼 친구들과 어울려야만 낼 수 있는 협주곡이었습니다.
바다 맛에 곁들여 술술 넘어가던 소주는 강원랜드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린 쌍쌍의 부부에게 내년 이맘때쯤 잭팟 터지듯 신혼첫날밤 베이비가 다문화가정 모두에게서 왕창 들려오길 염원하는 축하와 기원의 술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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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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