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 인원 구조조정 등으로 노동자들의 노동강도가 강화됐다.
이국언
"스펙보다는 무슨 일 하고 싶은지 결정하고 준비해야"현대건설의 한 하청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민영승(37)씨는 요즘 인천 서구 매립지 안에 위치한 굴포천 경인운하 공사현장 관리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김씨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비롯한 불황과 경기침체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회사에서 월급이 제때 나오고, 맞벌이를 하는 아내가 학원강사여서 자녀 교육비도 크게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변 동료들이 반쪽 난 펀드를 들고 울상이 됐을 때도, 그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었다.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펀드나 주식 등엔 일체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처럼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1996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월급쟁이'는 큰 매력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취업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통닭집을 차렸다. 그러나 곧 외환위기가 터졌고, 식용유나 닭 등 재료값이 폭등하면서 결국 6개월 만에 장사를 접어야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취업 전선에 나섰지만, 이미 외환위기가 휩쓸고 간 취업시장은 꽁꽁 얼어있었다.
간신히 음악교육신문사에 들어가 초봉 70만원을 받으며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월급쟁이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옷을 팔았다. 그러나 경험이 없던 그는 다시 손해를 보고 장사를 접었다. 다시 구직에 나선 그는 몇 차례 이직을 거듭하다가 현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
"먼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내일 먹고사는 게 문제였다. '나한테 맞는 게 뭐지?'라고 반문하면서 작은 회사 몇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전부 일주일 안에 취업이 되더라. 아무데나 취직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도 있었지만, 지금 현재 있는 회사에서 내 장래를 계획할 수 있기 때문에 만족한다."민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현장으로 나가고, 밤 10시경에 퇴근한다. 건설 현장을 관리해야 하니, 주말에도 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건설업계에 20대가 없다. 우리는 관리자 역할을 하는데, 이마저도 배우려고 왔던 20대가 3개월을 못 버티더라. 더 편하고 큰 회사로만 가려고 하면 당연히 취업이 안 된다. 도전정신을 갖고….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겠나? 눈높이를 조금만 낮춰서 회사에 들어오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미래가 보인다."92학번인 이아무개(36)씨에게도 외환위기는 남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다.
"졸업을 했는데, 신규사원을 뽑는 회사가 없었다. 원서를 낼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겨우 뽑는 곳이 보험영업이었다. 지금도 가끔 동기들을 만나는데, 아직까지 보험영업을 하는 친구들이 절반은 넘더라."이씨는 외환위기 당시 대학원으로 피신(?)했다가 졸업 후 원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연 3000억 매출에 600억 순이익을 올리는 IT 계열 상장기업에서 인력팀장을 맡고 있다. 이씨의 회사는 올해 신입사원을 30명 뽑았고, 내년에는 더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외환위기 때와 지금은 다르다. 당시에는 아예 사람을 뽑지 않았지만, 지금은 중소기업 쪽에 기회가 있는데 (구직자들이) 안 가려고 한다.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럼, 구멍가게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동료들도 많게는 6~7개 회사를 거쳐서, 우리 회사까지 왔다. 금융위기나 경기침체를 핑계댈 게 아니다. 분위기만 위기지, 실제 일반 기업은 이제 얼마나 많이 튼실해졌나. 재무적으로 안정돼 있고, 돈 잘 버는 기업도 많다."이씨는 "스펙은 공기업 취업용이고, 요즘 기업들은 직무 위주로 사람을 뽑는다. 신입보다 경력직을 선호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며 "취업 준비생들은 어떤 회사를 갈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