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구직자일 뿐이고, 기업은 안 뽑을 뿐이고"

11년 만에 찾아온 최악 취업 한파... '취뽀'에 나선 청년들의 구직전쟁

등록 2008.12.18 13:03수정 2008.12.1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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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지난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예비후보 합동연설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이, '취직 좀 시켜주면 안 되겠니'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은 지난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예비후보 합동연설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이, '취직 좀 시켜주면 안 되겠니'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모습.오마이뉴스 이종호

"오늘 하나는 서류 불합격, 하나는 면접 불합격, 우울하네요.ㅜ_ㅜ" (ID 율탱이)
"원해도, 노력해도, 절대 안 되는구나" (ID 망고셰이크)
"내년에 더 힘들다는 말만 주변에서 하네요. 아, 이를 어쩌죠." (ID 취업원츄) 

최근 취업 커뮤니티 카페 '취업뽀개기(취뽀)'에 올라온 구직자들의 '탄식'이다. 회원 수가 무려 100만명에 이르는 이 카페에는 16일 하루에만 8만4000여명의 방문자가 다녀갔고, 490여명이 신규회원으로 가입했다. 카페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올려놓는 스펙쌓기 노하우, 이력서, 자기소개서, 대기업 채용정보, 면접족보 등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계 대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2년째 비즈니스 영어회화 강의를 하고 있는 조수경(25)씨도 '취뽀' 회원이다. 오전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2시간동안 강의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취뽀'에 접속해 업데이트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구직자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도대체 어떤 스펙을 원하는 거지?

지난해 8월 대학을 졸업한 조수경씨가 취업 전선에 뛰어든 것은 지난 10월. 그 전까지는 영어강사 수입이 적지 않아, 꼭 취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정규직인 영어강사로는 아무래도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두려움 때문에 뒤늦게 취업하려 팔을 걷어붙였다.

'취뽀'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기업체 몇 곳에 이력서를 집어넣고 오후엔 영어학원으로 향한다. 이번엔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라 배우는 학생이다. 대학 1학년 때 미국 텍사스 A&M 대학에서 1년 간 교환학생으로 공부했고, 4학년 땐 미국 호텔경영인턴십으로 1년 반 정도 유학을 다녀온 조씨의 영어회화 실력은 강사를 할 만큼 수준급이다.

그런 그가 다시 영어학원을 다니는 이유는 기업체에서 요구하는 스펙, 즉 토익·토플 점수 때문이다. 지금까지 20여 곳에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번번이 서류 면접에서 떨어졌다.


조씨는 "영어강사 경력을 살려서 외국계 기업 인사·교육 관련 부서를 지원하고 있다"며 "아무리 제가 회화를 잘해도 (토익·토플) 점수가 안 나오니까 면접 기회조차 안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년 1월 토익·토플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조씨의 목표는 '만점'이다.

조씨는 "서류 자체를 받아주지 않으니까, 기분이 많이 상하고, '내가 정말 많이 부족한 건가, 도데체 어느 정도 스펙이 되어야 입사가 되나'하는 자책감도 든다"며 "솔직히 11월 중순까지는 기대를 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절망적"이라고 토로했다.


요즘 조씨는 '취업'이라는 것을 꼭 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정규직인 영어강사를 계속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주변에선 흔히 눈을 낮추라고 한다. 4년제 대학을 졸업했지만 2년제 대학 졸업자도 지원이 가능한 회사가 있어서 지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만족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 오히려 (스펙을 요구하는) 기업 쪽에서 우리들의 눈을 그렇게 높여 놓은 것 아닌가?"

 토플 응시원서를 내기 위해 한미교육위원단 사무국 앞 길에 장사진을 친 사람들.
토플 응시원서를 내기 위해 한미교육위원단 사무국 앞 길에 장사진을 친 사람들. 오마이뉴스 박정호

스펙에 대한 김아무개(23)씨의 생각은 조씨와 다르다. 김씨는 학점 3.5 이상에 토익도 900점이 넘는, 남부러울 것 없는(?) 스펙을 갖추고 있었지만, 매번 서류 통과조차 안 됐다.

"스펙 같은 것 준비해봤자 소용없다. '남자'가 바로 스펙이다. 특히나 이렇게 어려울 땐 여자보다 남자를 더 많이 뽑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남자 아니고 인문계열이면 서류에서 다 걸러진다고 하던데… 설마 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진짜더라."

김씨는 사실 방송사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지만 '3년 이상 경력자'라는 벽에 부딪혔다. 일단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졸업 후 한 신문사 기자로 입사했던 김씨는 지난 9월 말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뒀다. 한 방송사로부터 채용이 확실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송사 문 앞에서 그의 기대는 산산히 부서졌다. 난데없이 '낙하산'이 떨어진 것이다.

그는 "방송사가 얘기한 표면적인 이유는 내가 경력이 없어서라고 하더라"며 "경력도 없고, 인맥까지 없는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취업은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중요한 일이다. '사회가 날 원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내가 왜 있는 거지'라고 계속 자책하게 된다. 취업이 안 돼 정체성이 흔들리는 친구들이 엄청 많아졌다."

정체성만 흔들리는 게 아니다.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은 졸업생들에게 취업 문제는 금전적인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 4년 동안 2000만원 정도의 학자금을 빌려 쓴 김미선(26)씨는 졸업을 2개월 앞두고 은행으로부터 한 장의 통지서를 받았다. 졸업과 동시에 대출금의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취업을 했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된 김씨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실제 김씨는 졸업한 다음 달부터 매달 30만원의 대출금을 갚기 위해 어머니께 다시 손을 벌려야 했다. 비록 6개월의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가 최근 취업대란을 뚫고 한 인터넷교육사이트 업체에 취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절박함이 작용했다고 한다.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홍익대 학생들이 지난달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앞 거리에서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며 '홍대생이 떳다' 거리 퍼포먼스를 벌였다.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홍익대 학생들이 지난달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앞 거리에서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며 '홍대생이 떳다' 거리 퍼포먼스를 벌였다. 권우성

최악의 취업한파, 내년이 더 문제... 한은 4만, 정부 10만 예상

'밀레니엄 학번'이라는 희망을 안고 대학에 들어와 졸업을 했거나 앞두고 있는 2000년대 초반 학번들은 요즘 '절망'이란 단어를 실감하고 있다. 금융위기의 직격탄이 취업시장을 휩쓸면서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최악의 취업대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올 3분기 '청년 백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기업들의 대규모 공개채용은 사라지고 소규모 상시채용마저 눈을 씻고 찾아야 할 판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기업들은 신입직보다 경력직을 선호한다. 아니, 아예 사람을 새로 뽑기보다는 내부 인원의 직무를 이동시켜 비용을 줄이려고 한다. 올 하반기 채용규모를 축소하거나 취소, 보류하는 기업들이 속출했던 이유다.

취업·인사 포털사이트 인크루트의 '2008 채용결산 조사'에 따르면 올해 채용은 전체적으로 전년대비 3.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은 0.4% 줄어든 데 그쳤지만, 중견기업은 18.9%, 중소기업은 20.4%나 크게 감소했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가치로 설정했지만,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공공기관의 신규채용은 오히려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기획재정부와 30개 주요 공공기관에 따르면 한국전력과 토지공사, 주택공사 등 주요 공기업의 올해 신규 채용 인원과 채용 예정인원은 946명으로 지난해 2839명에 비해 66.7% 감소했다.

특히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기업들까지 나타나면서 취업난에 실업 공포까지 겹쳤고, '제2의 외환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올해보다 내년에 본격적인 채용한파가 몰아닥칠 것이라는 데 있다.

인크루트가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3일까지 상장기업 478개사를 대상으로 '2009년 대졸신입 채용계획'에 대해 일대일 전화면접 조사를 실시한 결과, 내년 채용에 나서는 기업은 38.3%(183개사)에 그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같은 시기 실시한 동일한 조사에서 채용에 나서는 기업 비율이 80.1%로 나타난 것과 비교해 무려 41.8%포인트가 급감한 수치다.

반면 채용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곳은 36.2%(173개사)에 이르러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 나타난 5.6%보다 6~7배나 높게 나타났다. 10곳 중 4곳 가까이 채용문을 닫아건다는 얘기다. 아직 채용을 할 것인지 계획을 잡지 못한 곳도 25.5%(122개사)로 지난해 조사(14.3%)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대한민국은 백수 공화국이다." 부산청년희망센터는 ‘청년실업해소와 청년고용촉진법 제정’을 위해 청원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0월 11일 부산대 앞에서 열린 퍼레이드 모습.
"대한민국은 백수 공화국이다." 부산청년희망센터는 ‘청년실업해소와 청년고용촉진법 제정’을 위해 청원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0월 11일 부산대 앞에서 열린 퍼레이드 모습.부산청년희망센터

정부에서 내놓은 고용지표 전망 역시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기획재정부는 내년도 경제전망에서 고용지표를 10만명으로 내다봤다. 당초 올해 예상치인 15만명에서 5만명이나 낮춰 잡은 셈이다. 정부는 고용부진 심화로 인해 실업률 역시 올해 3.2%에서 소폭 상승한 3.4%내외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수치마저도 전망치라기보다는 목표치에 가깝다.

특히 내년에는 한국은행 전망치인 4만명 수준까지 줄어들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정부는 재정투입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나가겠다고 장담하지만, 대부분 저임금 단순 근로직에 그칠 것으로 보여, 치열한 '좋은 일자리' 찾기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취업대란 #금융위기 #취업뽀개기 #스펙 #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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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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