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비 격차'는 교사도 인정!

초등학교 영어 교육의 현실을 보여주는 10가지 장면 ②

등록 2008.12.19 09:43수정 2008.12.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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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잘하는 애들 몇 명만 빛나는 수업

 

'좋은학교 만들기 자원학교'라는 사업이 있다. 우리 학교에는 영어 우수아를 뽑아 원어민과 교재비만 내고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30-40명의 아이들이 너무 많고 아이들 영어 격차가 심해서 수업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열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그것도 잘 하는 아이들만) 어떻게 수업을 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결과는 '잘 하는 아이들 대답만 듣고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물론 사교육의 수혜자들이었다. 원어민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이건 뭐니?" "그건 연필이야" "그건 지우개야"

 

매일 이루어지는 이런 단순한 반복들 앞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나이 어린 초등학생의 입장을 헤아려 '한마디'도 못 하는 아이들을 위해 한 마디라도 입을 열어 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두려워서, 못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싫어서 하지 않겠다는 아이들 앞에 그 원어민은 얼마나 무력하게 서 있겠는가?

 

#7 도미노 게임, 한 마디라도 해 볼래?

 

'한마디'도 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고안한 것이 '도미노 게임'이다. 그날 배운 표현을 공을 돌리면서 혹은 일어서 있다가 앉으면서 한 번씩 말해 보게 하는 고육지책이다. 아이들의 격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발음이 어려운 부분, 여럿이 함께 실수하게 되는 부분에 대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사의 입장만 생각한 것이지, 그런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

 

물론, '내 수준이 이러니까 나는 집에서 더 열심히 연습해야지'라고 생각할 아이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격차를 확인하는 것이 초등학교 3학년이라면 너무 이르지 않는가? 그때부터 영어는 어려운 것, 내가 못하는 것으로 낙인 찍어 포기하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다른 교과라면 달랐을 것이다. 우리말로 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만 읽고 쓸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기 영어교육으로 인한 '격차'는 해소되기 어렵다. 인지적인 능력보다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8 평가, 영어 전담 교사로서의 자괴감

 

학기말이다. 한 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평가하며 정리하는 시기이다. 매 학기 평가를 할 때마다 영어 전담 교사로 자괴감을 느낀다. '잘 하는 아이들은 내가 가르친 게 아니라 학원이 가르친 것 같고, 못하는 아이들은 학원이 가르치지 않고 내가 잘 못 가르쳐서 그런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미노 게임이라는 잔인한 방법을 써도, 패스워드를 만들어서 한 마디 해야 영어 교실에 들어오게 해도, 웃긴 짓 못난 짓 해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챈트를 해도 '사교육비 격차'는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학교에는 영어를 잘 하는 선생님들이 있지만 영어 교과 전담 교사 자리는 기피 대상이다. 목 쓰고 몸 쓰고 해야 돌아오는 '기쁨'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영어'라는 교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 '관계' 맺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9 국가 교육과정은 그대로인데 영어 시험은 날로 어려워지고!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 산하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의 초등영어수업지원단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매년 이 단체에서 제작하고 있는 듣기, 읽기 평가 시험 문제가 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특히 올해는 교육과정에는 나오지도 않는 표현이 듣기 평가 문항으로 들어와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담당자는 이렇게 문제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다. 대체로 문제가 너무 쉬워서 변별력이 없다고 한다. 어떤 학교에서는 90%가 100점을 받았다고 하더라. 지역 격차가 너무 심하니까 이런 전화를 받는 것 같다. 교육 과정에 나오지 않는 것은 교실 영어 사용 환경에서 배울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넣은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학교 시험지에는 비가 내린다.

 

영어 인플레다. 국가가 영어 교육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교육 시장이 영어 교육을 주도하는 것이다. 거기에 기름 붓는 격으로 국가 영어 교육도 강화하겠다고 하니 사교육을 잡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 위세를 키워 주고 있다.

 

#10 나는 네가 지난 4년 동안 한 일을 알고 있다!

 

2002년 5학년 담임을 맡았다. 5학년에 영어 전담 교사를 배치해 줄 수 없다는 학교 방침에, 나는 영어 교육에 대한 연수나 교육을 받은 바가 없어서 영어를 못 가르치겠다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배워서 가르치라고 했다. 그래서 학원 다니고, 연수 받으며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 전담 교사를 하다가 출산 휴가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왔더니 원어민과 수업을 하라고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원어민과 수업을 했다. 내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아이들 수업에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연수도 열심히 받았다.

 

알파벳도 모르는 5학년 아이들을 늦게까지 남겨 놓고 음철법을 가르칠 때 한 선생님이 그러셨다. "그래봐야 소용 없어~!" 4년이 지났다. 그 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아이들의 영어 격차는 사교육비 격차에 아주 정직하게 정비례한다. 그렇지만 그 말이 맞다고 해서 그 말을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기마다 수행 평가가 끝나면 영어 단어 읽기를 못하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불러다가 타이른다. 너희들 옷에 뭐가 써 있느냐, 다 영어다, 그런 걸 읽는 방법을 지금 배우지 않으면 다시는 배울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방학 때 무료로 캠프하는데 참가해서 같이 공부해 보자, 그렇게 한 명씩 설득한다.

 

바우처를 이용한 무료 캠프, 영어 읽기 부진아만을 위한 프로그램인데도 아이들은 잘 나오지 않는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끝나고 극장 가서 영화를 보여 주겠다고 회유하지만 10%라도 참석하면 그건 성공이다. '공부' 하는 즐거움, 하나 하나 알아가는 '기쁨'을 단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영어'란 그저 무의미한 대상일 뿐이다.

 

저소득층=영포아인 현실을 깨보려고 노력했던 지난 4년의 경험은 우리 아이들이 학습 의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학습하는 즐거움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방학 캠프를 통해 겨우 겨우 음철법 정도는 익혀서 어느 정도 단어는 읽게 되었다 해도, 바로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좌절한다.

 

방학 때 고만고만한 친구들하고 공부하던 것과는 '격'이 다른 공부와 '격'이 다른 친구들의 영어 실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 한 번 영어 공부를 할 시기를 놓치면 다시 따라잡기에는 엄청난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는 뭣도 모르고 그냥 흘려보내고, 나중에 6학년이 되어 현실의 막중함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지만 아이들에겐, 특히나 가정 형편이 힘든 아이들에겐 너무도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너무도 좁다. 쉽게 영어를 포기하는 거다.

 

다른 모든 교과에서는 성취도가 높은데 유독 영어, 그 중에서도 말하기 영역에서 바닥을 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영어로 말하는 것이 단지 문장을 외워서 표현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그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특히나 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배운 표현을 상황에 맞게 써 먹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그것을 요구했던 교육 과정, 그리고 내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 영어 교육 11년, 객관적으로 평가하라

 

초등학교 영어 교육 수업 시수를 확대한다는 결정은 우리 교육과 미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결정이다. 그러나 필자가 지난 11월 10일 초등학교 영어과 교육과정 개정 공청회에 참석하고 느낀 점은 영어 교육 강화론자들이 책임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정책을 학문적 근거도 대지 못하는 연구자가 연구 보고서라고 내 놓고, 공청회에서 발표를 한다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효과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없으면서도, 정책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으면서, 영어 괴담은 끊임없이 유포되고 있으며, 그 괴담을 등에 업고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부추기며 사교육 시장은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효과가 있다고 한들, 사교육비의 주범인 초등 영어 교육을 확대하는 것이 정책적으로 올바른 입안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 간의 영어 교육이 성과가 있었는지 국가적으로 검증하고, 그 효과에 비해 사회적 문제가 더 크다면 과감히 철폐하거나 축소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12월 16일 있엇던 영어정책 토론회 발제문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2008.12.19 09:4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글은 12월 16일 있엇던 영어정책 토론회 발제문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조기영어교육 #초등영어교육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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