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7일 오전 서울 을지로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전광우(오른쪽) 금융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대공황 원흉 '초거대 산업-금융복합 독점체' 눈앞 이처럼 은산분리 완화 방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재벌 가문에겐 은행 경영권을 인수할 가능성이 생긴다. 즉, 제1금융권(은행)이 재벌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제2금융권(증권·보험)에 대한 재벌 가문의 소유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조치가 추진되고 있다. 바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 금산법(금융산업구조개편에관한법률) 개정안 등이다.
모두 아시다시피, 한국의 재벌 그룹들은 이미 산업체와 증권-보험 등의 금융업체를 함께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삼성물산과 삼성증권-삼성생명-삼성카드를 거느리고 있는 삼성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전자가 삼성카드 지분을 보유하는 식으로 이뤄지는데 현행 법률 체계에서도 불법으로 몇 년 내에 관계를 청산해야 하는 사정이다.
이렇게 말썽 많은 모회사-자회사 체제에서 지주회사 형태로 가려 해도 계열사 간 지분 및 상호채무보증을 해소해야 할 뿐 아니라, 일반지주회사의 경우엔 금융업체를, 금융지주회사인 경우엔 비금융업체를 정리해야 했다. 재벌 가문이 지배하는 계열사가 줄어들 수 있는, '경제권력'의 축소 위기였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이명박 정부가 이런 문제들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실 모양이다. 금융지주회사가 제조업 자회사를 거느릴 수 있게 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재벌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증권사나 보험사를 중심으로 제조업체까지 모두 합법적으로 거느리는 지주회사를 구성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조치는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금융지주회사의 제조업 자회사 허용은 투자은행업의 핵심 기능 중 하나인 '기업 사서 가치 높여 팔기'(buying out)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미국 등의 '단독 투자은행 모델'(상업은행을 끼지 않은, 제2금융권 업체 중심의 투자은행지주회사)을 배경에 깔고 있다. 즉, 증권-보험 지주회사를 거대 투자은행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다만 한국의 재벌 그룹들이 계열 증권-보험사를 중심으로 금융지주회사를 구성하는 경우 현재의 계열 제조업체들 역시 항구적으로 보유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지주회사가 거대 제조업체를 영구 보유하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둘째, 금융지주회사에 제조업 자회사를 허용하는 조치는 재벌 가문의 그룹 지배력을 그대로 보존해주려는, 몹시 계급성 짙은 정책으로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재벌 가문이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합법적으로 유지하려면 일부 업체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재벌 가문이 현재의 계열 제조업체와 계열 금융업체에 대한 지배력을 합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지원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더욱이 내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과 보험업법 개정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재벌 계열 증권-보험사들은 지급결제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은행 역할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그동안 불안하게 유지되어 오던 재벌의 제2금융권 지배를 합법화하고 제1금융권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철폐)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20~30년 간 미국에 존재했으나, 1930년대 대공황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면서 사라졌던 '초거대 산업-금융복합 독점체'가 21세기 초 한국에서 부활할 전망이다.
벤치마킹 대상 파산하는데 금융복합체 밀어붙이기지금까지 봤듯이, 금융허브 혹은 금융중심지 노선은, 중국이 제조업 왕국으로 등장한 이후 위기감을 느낀 역대 한국 정부들이 새로운 국가적 대안으로 추진해온 정책이다. 좌파로 불리던 정권이든, 우파로 불리는 정권이든 이 노선만큼은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지구적 스탠더드였던 지난 10년 동안 금융중심지 노선엔 일정한 도구적 합리성이 있었다.
또한 이 금융중심지 노선의 핵심 수단 중 하나는 초대형 금융복합체 육성이다. 이명박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철폐) 역시 제1·제2 금융권에 투자를 집중시켜 대형화·겸업화된 투자은행업 중심의 금융복합체를 설립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이 노선의 영향권 안에 있다. 다만, 금산분리 완화에 따라 등장할 산업-금융 복합체가 다른 나라에서 찾기 힘든 형태라는 점으로 미루어 지나치게 재벌 가문의 연고주의적 이해를 고려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겠다.
문제는 이명박 정권을 포함한 역대 한국정부의 벤치마킹 모델이었던 미국 금융시스템이 파산한 가운데서도 꿋꿋하고 용감하게 금산분리 완화(철폐)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들의 벤치마킹 모델이었던 미국의 단독 투자은행지주회사들(골드만삭스-베어스턴스-리먼브러더스-메릴린치-모건스탠리)은 이미 파산하거나, 강하게 규제를 당하는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재정기획부나 금융위원회는 단독 투자은행이 아니라 CIB(은행을 낀 투자은행지주회사)를 모델로 삼아왔다고 발뺌하고 있다. 그러나 BOA나 씨티은행 같은 CIB도 단독 투자은행지주회사만큼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재편기가 도래하고 있다. 지금까지 금융과 산업의 지구적 스탠더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벤치마킹 모델이 사라졌다면 기존의 국가 노선을 다시 고민하고 의견을 모으는 것이 건전한 태도다. 금산분리 완화 문제는 금융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경제의 틀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재벌 가문과 연고적 이해에 따라 금산분리 완화(철폐)를 추진해온 것이 아니라면, 정부 여당은 야당 및 시민사회와 머리를 모아 새로운 국민경제 노선을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야당들도 초정파적인 태도로 이 문제에 협력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이명박 정부의 금융정책 중 '금융복합체 육성 대책'에 국한된 것임을 밝힌다. 자본시장통합법과 보험업법 개정안 등에서 금융상품과 관련된 부분이나 금융기관 건전성 기준(BIS나 시가주의 회계 등)에 대해서도 심도 높은 시민사회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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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금융산업 재편 '대상'에서 '주체'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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