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울릉도에 묶인 날, 늙음을 깨닫다

늙음은 결코 단풍처럼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등록 2008.12.15 16:34수정 2008.12.1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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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늙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도 늙었다고 하겠다. 아직 오십 중반이지만 며칠 전 내가 많이 늙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늙음은 가을단풍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늙었다는 실상이 가장 먼저 찾아온 게 귀였다. 젊은 군 시절 어찌어찌 맞아 고막이 터졌었던 즉 이게 다스리기가 마냥 쉬운 게 아니었다. 툭하면 들리지 않고, 건듯하면 윙윙거리며 아팠다.

 

둘째는 코다. 비염이 심해 사십 중반부터 코로 숨쉬기가 힘들었다. 반듯하게 천정을 보고 누우면 왼쪽 코가 막히니 그 쪽을 뚫기 위해 오른 쪽으로 돌아눕다가 또 그 쪽이 막히면 다시 반듯하게 눕기를 반복하고 산다. 이리 사는 게 고행이다.

 

그러다가 50을 넘기면서 이를 만난다. 이놈은 성깔이 보통이 아니다. 처음에는 찬 것 단 것을 못 먹게 하더니 나중엔 신 김치도 씹지 못하게 막는다. 한 쪽이 그러더니 이내 증상이 양 쪽으로 번진다. 치과 선생님들은 열심히 치료해도 소용없다는 나의 말을 듣고서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런 증상은 특별한 처방이 없습니다. 일종의 노환이지요."

 

하긴 애가 터져 찾은 치과의 친구 녀석도 왜 치료를 제대로 못하느냐며 항변하는 내게 간호사가 있는 앞에서 끌끌끌 혀를 차면서 철딱서니 없는 아이 어르듯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아, 이 녀석아, 너 늙은 거는 모르고 어찌 젊은 시절만 같지 않다고 말하는 거냐?"

 

마누라가 이틀 예정으로 울릉도에 갔다. 울릉도에 도착한 이후 갑자기 한파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배가 묶이고, 따라서 마누라는 일행들과 함께 망망대해 속에 닷새 동안 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바다가 막은 울타리에 완전히 코를 꿰인 것이다. 주말 3일 동안 나를 돌볼 필요가 없는 아내에게는 겁나게 좋은 일이었겠지만 내게는 다소 견디기 억울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금요일 오전 문자메시지를 점잖게 보냈다. '바람이 분다. 확인해 보니 이틀은 못 나올 거 같다'고 했더니 '그럼 헬기나 한 대 보내주라'는 답신이 왔다. 결혼 이후 휴일에 떨어져 지낸 기억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다소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이까이 꺼'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떨떠름한 마음으로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내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나물류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양과 맛이어서 약간 신경이 쓰인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지만 워낙 식성이 좋은데다가 배앓이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잊어 버렸는데 배가 끓다가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울컥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그쪽은 태평연월이었다.

 

"성인봉을 꼼꼼히 봤어요. 그리고 해수 찜에서 3시간이나 보냈어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래? 그럼 거기서 살아, 난 이제 아무도 들어 올 수 없도록 집 열쇠를 전자식으로 바꿀 거야."

 

간신히 아픈 배를 움켜쥐고 퇴근해 집에 도착하니 아들 녀석이 저녁을 지어 놓았다. 그러나 쌀의 결기가 빳빳이 힘차게 살아있는 '고두밥'이었다. 그런 아들 녀석을 데리고 동네 국밥집에서 국밥을 말아먹고 들어왔다.

 

뱃속은 더욱 상태가 악화되었다. 아픈 배를 움켜쥐다가 스르르 일찍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에 복통으로 이내 잠에서 깨어났다. 저녁나절의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새벽부터 동이 틀 때까지 무려 일곱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설사를 했다. 머리도, 배도 아팠지만 우습게도 '밑자리'가 가장 아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마누라에게 전화를 했다. 여덟시가 넘어 있었다.

 

"홍시 어디 있어?"

"왜요?"

"왜요는 무슨 왜요야. 홍시 어디 있냐고?"

"세탁기 옆 종이박스에 담겨 있어요. 왜 찾아요?"

"뚝!"

 

마누라와 내가 보내고 받은 말의 요약이다. 배는 아프고 더 이상 흘리면 죽을 것 같아 예로부터 설사에 특효약으로 치는 감 좀 먹으려는데 망한 놈의 마누라. 속에서 열불이 났다. 감 하나를 찾아 먹고 아들을 깨워 밥을 먹인 다음 약을 지어 오도록 했다.

 

또 점심 때가 되었다. 무언가 요기는 해야 됨에도 반찬이 없었다. 아들이 좋아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는 단 하나, 김치찌개였다. 돼지고기를 사오게 해 이틀을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끓였다. 뱃속으로 보아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했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을 때도 있는 것. 저녁까지 찌개 냄비 하나 만을 놓고 밥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마누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때요? 잘 있어요?"

"“뭐가 잘 있어? 당신 같으면 배가 아파도 잘 있을 수 있어?"

"어쩌다 배가 아파요? 몸도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한대요?"

 

그제야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형광등 같은 마누라. 홀로 마누라의 무감각을 탓하며 옹알거렸다. 그러다가 선잠과 뒤척임을 오가며 이튿날 새벽까지 또다시 일곱 번을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머리까지 어지럽다가 아파왔다.

 

아침과 점심을 간장으로만 먹고 저녁은 맨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저녁을 해결하고 나서 울릉도를 확인해보니 배가 도착해 승객을 싣고 회항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전화 한 통 없다니……. 망할 놈의 마누라. 이내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던 아들 녀석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머니 전화의 배터리가 없는 모양이지요?"

 

망할 놈의 마누라, 슬그머니 제 엄마를 역성하는 망할 놈의 아들. 그러다가 잠이 들었고 현관문을 따는 소리와 함께 마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 방문이 열리면서 마누라가 들어섰다. 등산복 차림으로 찬 냄새를 풍기며 들어서는 모습을 보니 반가움과 함께 불현듯 복통이 다시 밀려왔다.

 

"비켜, 또 아파."

 

화장실에 앉아 이틀 동안의 나를 떠올리노니 참으로 내력 없는, 마누라에게 응석이나 부리는 하찮은 꽁생원의 모습이었다. 늙은 징표였다. 마누라가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늙었고 완전히 길들여진 것이다. 젊은 시절, 마누라가 없으면 자유가 주어졌다고 신나했던 내가 허연 머리칼의 몸뚱이 뿐 아니라 정신마저도 늙어버린 것이다. 늙음이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노을을 향해 처연히 떠나는 배와 그 안에 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내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황혼이혼'은 결코 안 될 말이었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이 방을 나서면 '마누라를 어떻게 다시 대할 것인가?'를 두고 비굴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2. 4 ~ 12. 7일까지 아내가 울릉도엘 다녀 왔습니다. 바람이 불어 당초보다 3일 동안 더 있게 되었지요. 그동안 저는 많이 아팠고 그러다가 늙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늙음은 결코 단풍처럼 아름다운 게 아니었습니다. 

2008.12.15 16:34ⓒ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지난 12. 4 ~ 12. 7일까지 아내가 울릉도엘 다녀 왔습니다. 바람이 불어 당초보다 3일 동안 더 있게 되었지요. 그동안 저는 많이 아팠고 그러다가 늙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늙음은 결코 단풍처럼 아름다운 게 아니었습니다. 
#늙음 #황혼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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