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빛 돌담에 낙서를 하고 있는 어릴 때 내가 보인다
녹우당에서 나와 고산사당으로 가는 골목길은 고즈넉한 돌담길이다. 동백나무가 우거진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 4백 년 이상 묵은 소나무 한 그루가 파수꾼처럼 우뚝 서서 고산사당을 가리고 있다. 고산사당은 앞면에 나무문이 3개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을 가진 건물이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어초은 사당은 담장을 둘렀으나 1칸 문에 정 측면(正側面)이 1칸으로 된 건물이다. 그 밖에 북동쪽으로는 어초은 제실(祭室)인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뒷산에는 오백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빼곡이 우거져 있다. 그 비자나무숲을 낀 산중턱에 어초은 가묘가 연동 들녘을 굽어보고 있다.
녹우단 곳곳에 길게 뻗어 있는 정겨운 황토빛 돌담을 따라 천천히 거닐며 어릴 때 추억을 떠올려 본다. 나그네가 어릴 때에도 이런 황토빛 돌담에 쪼그리고 앉아 낙서를 하며 햇살을 쬐다가 심심하면 구슬치기를 하고 자치기를 했었다. 그래서일까. 황토빛 돌담에 '분이는 바보! 멍청이!'라고 쓰고 있는 어릴 때 내가 보인다.
녹우단 오른쪽, 고산유물관 들머리에도 작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고산유물관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눈부신 금빛을 쏟아내고 있다. 이곳 유물관에는 공재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과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윤고산 수적관계 문서(보물 제482호) 등 유물 4619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공재 윤두서 대표적 작품인 '백마도'다.
고산 윤선도의 대나무처럼 꼿꼿한 선비정신과 탁월한 문학정신이 오늘도 새록새록 숨 쉬고 있는 녹우단. 녹우단 앞에 서면 삼라만상이 '어부사시사' 시구가 되어 절로 읊조려진다. "자러 가는 까마귀가 몇 마리나 지나갔느냐 / 돛 내려라 돛 내려라 / 앞길이 어두운데 저녁눈이 꽉 차 있다 /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동사'(冬詞) 몇 토막)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1587년, 선조 20년 6월 22일 한성부 동부(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 2남으로 태어났다. 고산은 8세 때 해남 종가에 아들이 없어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 대종(大宗)을 잇는다.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자는 약이(約而).
1612년, 고산은 광해군 4년에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비난하는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 다음 해에는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돼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이 일어나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의금부도사직을 맡지만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와 은둔생활에 젖는다.
1628년, 고산(42세)은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면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사부를 맡는다. 1629년에는 형조정랑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낸다. 1633년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아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자 현감직을 내놓고 다시 해남으로 내려간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또다시 은거에 들어간다. 1652년, 효종 3년에는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를 맡았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로 복직된다. 1658년 동부승지를 맡았을 때에는 서원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하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 당한다.
1659년에는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놓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한다. 1665년 현종 6년에는 광양으로 유배되었다가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 동안의 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 뒤 유배에서 풀려나 보길도에서 은둔하다가 1671년 6월 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향년 85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무리한다.
고산은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했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났다. 한글로 쓴 고산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했으며,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고산 사후 1675년, 숙종 1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지은 책으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