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일반노조 홍윤경 사무국장은 파업을 마무리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을 마친 후 당분간 딸에게 '좋은 엄마'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는 데 집중하려 한다.
뉴스앤조이 김세진
510일간 이어진 파업 투쟁을 마치고 '비정규직 고용 안정'을 얻어낸 이랜드일반노조의 홍윤경 사무국장.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눈빛엔 생기가 돌았지만 왠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투쟁의 성과를 누리고 열매를 맛보고 싶을 터. 그러나 그는 자신이 거두려는 욕망을 버리고 뿌리는 자로만 남았다. 이랜드일반노조는 평범한 아줌마들의 투쟁, 비정규직이 회사를 상대로 벌인 투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랜드일반노조는 지난 12월 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권오성)·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유원규)에서 인권상을 받았다.
한 해를 넘어 다시 겨울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맞은 극적인 타결이 기뻤지만 아쉬웠다. 간부 9명이 희생했기 때문이다. "수고 많았다"는 말로 치하하기에는 희생이 컸다. 홍 사무국장의 가족도 아내와 엄마가 그리웠다. 파업을 마무리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을 마친 후, 홍 사무국장은 딸 진솔이와 고은이와 종일을 부대끼며 '엄마 노릇'을 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딸들에게 따뜻한 간식을 해주고 싶습니다"큰 딸 진솔이는 이제 4학년이다. 진솔이에게 엄마는 '내가 필요할 때 바로 달려오지 않는 사람'이다. 진솔이가 "엄마는 집에 와도 컴퓨터만 하잖아"라고 말할 때 가슴이 저리다. 곧 사춘기에 접어드는데 중학생이 되기 전에 아이가 원하는 걸 충분히 해주고 싶다. 천성이 예민한데다 엄마가 바쁜 것이 아이에게 힘들었나 보다.
진솔이는 엄마가 동생 고은이에게 1년 2개월 젖을 물린 것을 두고 "동생을 더 예뻐한다"고 질투한다. 그러나 고은이는 고은이 대로 억울하다. 고은이가 18개월에서 27개월일 때, 일주일에 단 한 번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이랜드일반노조가 파업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착이 형성되는 시기에 딸을 자주 못 본 엄마는 가슴이 시리고, 고은이는 7살인 지금도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긴 시간, 허공에다 외치는 것 같아 보이는 기간에도 무너지면 안 됐다. 힘들어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힘찬 목소리가 나왔지만 혼자 있을 때는 몸도 마음도 지쳤다. 딸 진솔이와 고은이에게만 아니라 엄마 홍윤경 사무국장에게도 가정은 좋은 안식처다.
엄마는 돈이 없어 전기가 끊겼다는 아줌마 가장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하고, 열심히 일한 아줌마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해고하는 회사에 기가 막히고, 똑같은 일을 하고 다른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 때문에 화가 난다. 홈에버 상암점을 점거할 때 무자비하게 끌려가던 아줌마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뛰고 물대포를 온 몸으로 맞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오솔하다. 남편이 퇴근할 때 맞아주지 못한 것, 딸들이 어릴 때부터 분에 넘치게 엄마를 이해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노동건강연대에서 장기 투쟁자를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했는데, 홍 사무국장은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다. 간부라는 책임에 '좋은 결과가 나올만한 항목'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는데도 그랬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결과를 받아들이고 지원을 통해 일주일에 두 번 심리 치료를 한다. 딸은 일주일에 한 번 놀이 치료를 한다. 노동 운동을 하다가 치료를 받는 상황이 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도 홍 사무국장은 "특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노동 운동을 하기 때문에 엄두도 못낼 비싼 치료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대신 이랜드를 선교지로 택했는데"
사실 홍 사무국장은 선교사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선교단체 사람들과 케냐를 여행한 후 '선교사'의 삶을 동경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겠다는 꿈을 꾸다가, 1991년 기독교 기업이라는 이유로 이랜드를 직장으로 선택했다. 아프리카 대신 경제 현장에서 '사회 선교사'로 활동할 수 있을 거란 바람을 품었다.
입사한 후 사내 예배에 열심히 참석했다. 찬양팀에서 노래도 하였다. 회사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이랜드가 기독교 기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었다. 찬양팀이 서는 기도회는 업무 외 시간에 반강제적으로 열렸다. 오전 9시에 근무를 시작하면 7시에 기도회를 여는 식이었다. 참석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이 있었다. 또 사측은 토요 성경 공부 모임을 만들어 '성경을 한 번 읽으면 5만 원 상품권, 모임을 네 번 나오면 문화 상품권'을 준다고 공지했다. 돈으로 신앙을 사려는 듯 했다. 사측은 예배와 찬양은 열심이었지만,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쉴 곳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주차를 대행하는 아저씨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 기업 이랜드에서 기독교적이지 않은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홍 사무국장은 예수에게 배운 대로 '약한 자, 가난한 자'의 편에 서기로 했다. 그래서 15년 전,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이랜드 노조를 만들었다.
박성수 회장은 무노조 경영원칙을 내세우며 알게 모르게 노조를 핍박했다고 한다. 1993년 이랜드 노조가 만들어질 당시 30명의 대의원와 800명의 회원이 있었으나 곧 500명이 탈퇴했다. 회사는 '노조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질문하며 직원을 회유하고 협박했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에게 잦은 인사발령과 저임금으로 부당하게 대우했다.
이랜드일반노조는 핍박 속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2000년에 해를 넘기며 265일 파업해서 일정부분 임금을 올렸고 일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꿨다. 당시 구호는 "못 살겠다. 50만원, 먹고살자. 70만원!"이었다. 이랜드 노조는 2004년 말에도 단기계약직의 계약기간 연장 투쟁을 벌였다. 또 임금 인상과 주5일제 관련 단체교섭을 벌였다. 기독교 기업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른 모습인 이랜드의 실체가 사내에 드러나고 있었다.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한 이후, 까르푸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독특한 이랜드 문화를 경험했다. 기독교 기업이 들어와서 더 좋아지려니 생각했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하고 이름 지은 '홈에버'는 기존 직원 휴게실과 수면실을 기도실로 바꾸었다. 쉴 곳이 없는 직원들은 복도 시멘트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거나 누워서 쉴 수밖에 없었다. 공사가 안 끝난 락카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