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어린이부모가 책읽기를 즐기면 아이도 책읽기를 즐깁니다.
최종규
(2) 살아가는 생각.. 민중을 위하여 시를 쓰는 민중시인이 일류 호텔의 바텐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면 사기꾼처럼 보일 것이다. 반대로 모던한 시인이 거진 인민복 차림으로 시장통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표절가로 보인다 .. (42쪽)부모님 집을 나와서 혼자서 살림을 꾸린 때는 1995년 4월 5일입니다. 어느덧 열세 해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어디에서나 찬방입니다. 제가 추위를 덜 타서 차디찬 방에서 깃드는지 모릅니다만, 언제나 짐차로 여러 번 날라야 할 만한 책더미를 이고 지고 다니는 터라, 책더미를 집어넣을 만한 집을 적은 돈으로 얻어서 달삯 내고 살자면, 살림집이 추운 곳 아니고는 얻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군대에 있던 스물여섯 달 동안에도 내무반은 늘 추웠고, 부대는 참으로 추웠습니다. 남녘땅에서 가장 추운 곳이기도 했지만, 한여름인 8월에도 밤에는 0도로 떨어져서 야상을 입어야만 했어요. 눈이 녹는 때는 부처님오신날이었고, 첫눈은 시월이 다 갈 무렵 비로소 내렸지만, 한 번 내린 눈은 두 번 다시 녹지 않는데다가, 영 도 밑으로 20∼30도 내려가는 일은 아주 우스웠어요. 1997년 12월 31일에 전역하던 그날까지 뻬치카를 쓰던 내무반이었기에, 난로가 아닌 난로에서 떨어진 곳은 내무반이었음에도 영 도 밑으로 내려가 있었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먹고살 때에도 한결같이 추위에 떨었는데, 한겨울에도 실장갑 한 켤레 끼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자전거를 몰면서 집집마다 신문을 두어 시간 돌리고 돌아오면, 한 시간 가까이 이불에 파묻힌 채로 눈물을 흘리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녹이고 코와 귀를 녹이며 사타구니와 팔다리를 녹였습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니 실장갑이고 옷이고 찬물로만 빨래를 했어요. 나이 서른이 넘어간 뒤부터는 겨울 찬물 빨래는 도무지 힘들어, 물을 덥혀서 쓰곤 하는데, 빨래를 마친 뒤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 버스 요금보다 비싼 돈을 주고 택시를 탈 때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중교통이 아닌 바에야 그것은 아주 사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진짜로 조용한 택시를 타 보지 않아서 그게 얼마만큼 호젓할 수 있는지, 그래서 도시생활 속의 내밀한 축복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걸 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문득 내 영혼을 돌아보게 하는 정일한 공간과 시간을 상상하지 못한다 .. (58∼59쪽)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며, 서울을 떠나 강원도 양구에서 살며, 강원도 양구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살며, 서울을 떠나 충북 충주에서 살며,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서 살며, 잠자는 방을 뺀 집구석 다른 데는 겨울이면 꼭 영 도 밑입니다. 그래도 한데에서 안 자고 기름보일러라도 돌릴 수 있는 집이니 얼마나 고마우랴 싶습니다. 다만, 잠자는 방에서도 잠바떼기를 걸치고 손가락을 엉덩이에 깔아 녹이면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안 마르는 기저귀를 다리고 아기 기저귀를 갈고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감자와 당근을 헹구어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서른 줄이 꺾이는 나이에 다다르면서 ‘겨울에 추위 걱정을 않고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방 하나 얻어서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빨래를 했을 때 한나절이 지나면 제법 마르게 되는 곳에서 지낸다면 얼마나 넉넉할까. 글을 쓸 때 손가락이 뻣뻣하게 얼어붙어서 눈물이 찔끔 나오는 일이 없으면 얼마나 잘 써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따순 방에서 살게 된다고 하여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지내게 된다고 하여 우리 살림이 더 넉넉해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따사로운 방에서 일하게 된다고 하여 내 글이 더 알차고 훌륭해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영화평론가가 일반적인 관객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비법은 물론 ‘다섯 번 이상’이 기본인 준비 과정에만 있지 않다. 오랫동안 영화를 공부해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들은 제작 현장을 방문할 수 있고 제작자와 감독ㆍ작가ㆍ스태프 등과 작품에 대해 캐물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기술 시사회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다 .. (77쪽)아기를 안고 길을 걷거나 전철을 타거나 어디 가게에 들어갈 때면, 우리한테 고이 마음써 주는 분들이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틀림없이 우리가 아기를 안고 있음을, 아기를 안고 건널목에 서 있음을 알면서도 바로 옆에서 담배를 태우는 어르신(모두 다 남자입니다)이 꼭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차림새를 본 분은 그림이 그려질 텐데, 앞뒤로 가방 서너 개씩 대롱대롱 매달면서 사진기까지 오른어깨에 걸치고 아기를 안고 걷는 사람 앞에서 길을 터 주지 않을 뿐더러 툭툭 치고 가는 분들(거의 모두 남자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도 많고 아가씨나 어린 학생도 많습니다)이 참 많습니다. 전철을 타고 일산 처가집에 찾아갈 때, 아기가 젖을 먹어야 되어 물려야 하는데, 빈자리가 없어서 맨바닥에 털푸덕 앉아서 젖을 물리지만, 자리 두 칸을 내어주는 분을 보기란 힘듭니다(‘두 칸’을 내주어야 하는 까닭은 아기와 애 엄마가 둘이기도 하지만, 십 킬로그램에 가까운 아기를 내내 무릎에 올려놓고 젖을 물리거나 안는다는 일이 얼마나 팔 빠지고 무릎 뽀개지는 일인 줄을 모르면, 그야말로 모를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거의 할머님들이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라고 부르시지만, 한 자리만 날 때에는 차라리 맨바닥에 털푸덕 앉아서 젖을 물리고, 제가 무릎 꿇고 앉아서 무릎에서 오줌기저귀를 갈아 줄 때가 훨씬 수월합니다.
용케 세 자리를 모두 얻어서 아기를 눕힌다고 해도, 전철 걸상은 살짝 기울어져 있으니 아기 목이나 허리에 참 안 좋습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영유아 동반자’ 자리라 한다면, 갓난아기가 어린 아기를 눕힐 때를 헤아려야 할 텐데, 그런 마음씀이란 없어요. 인천에서도 동인천역에는 ‘수유실(젖먹이는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그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며 드나드는 신도림역이나 서울역이나 용산역이나 시청역이나 종로3가역이나 동대문역 들에서 젖 물릴 수 있는 조용하고 바람 안 드는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 반면 인간들은 배우는 일에 속수무책이다. 예를 들어,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 ‘거짓말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싸우지 말라’는 도덕과 교훈을 배우지만, ‘배운 놈이 더 무섭다’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배움은 아무 소용 없고 말짱 도루묵이다 .. (82쪽)그러나, 이렇게 온몸으로 부딪히게 되니까 보일 뿐이에요. 이처럼 온몸으로 살아가니까 깨닫고 있을 뿐이에요.
어느 시인 말마따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머리로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버스나 전철을 탈 때에 거의 자리에 앉는 일이 드물었고, 자리에 앉았어도 벌떡벌떡 일어나서 다른 이가 앉게 내어주었지만,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님들한테 자리 하나 내어준다고 해서, 그분들 나들이길이 수월하지는 않음을 뼛속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막상 아이를 낳아 키우기까지, ‘아기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기를 어떻게 재우는가’를, ‘아기를 어떻게 씻기는가’를, ‘아기 사는 집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를 조금도 살피지 못했습니다. 겨우겨우 알아가고 있으며, 차근차근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듯 세상을 보고 있으며, 앞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삭여야 할 일이 많다고 느낍니다.
.. 예를 들어, 가야산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을 반대하기 위해 100만 인 서명운동이 필요할까? 혹은 시인 이상화의 생가를 보존하기 위해 그게 필요할까?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필요악일까? 열 명 혹은 다섯 명으로는 안 될까? 진정 단 한 명의 의견이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고심하는 사회에서라면 100만 인 서명운동 따위는 우스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명운동의 규모와 목표가 걸핏하면 100만 인이 넘는 진풍경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100만 인 서명운동은 그것이 어떤 선의에서 행해지든지 간에 우리 사회가 물량과 물리적인 세가 득세하는 사회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머릿수가 말하기 시작할수록 소수 의견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