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어린 나이에 부모 품을 떠난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들이 일본 감독자의 인솔하에 행진을 하고 있다.
'나고야 미쯔비시 근로정신대소송 지원회' 제공
혹자는 웬 투정이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그것도 벌써 20여일이 지난 문제인데 말입니다. 지난 11일 일본 최고재판소의 최종 '기각' 결정이 전혀 의외였던 것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쩌면 오늘의 이 결과를 우리가 자초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아픈 역사에 대한 망각과 그리고 무관심…. 못내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11월 11일 도쿄 최고재판소에서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 한일간의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재판 하나가 최종 패소하고 말았습니다.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이 그것입니다.
최고재판소는 이날 일제 강점기 시절 미쯔비시중공업에 강제동원 되어 피해를 입은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출신 피해 할머니 등 원고 7명이 일본국과 미쯔비시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최종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본에 가면 여학교도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5월경, 김성주(80, 경기도 안양시) 할머니는 순천 남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가사 일을 돕고 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의 부름에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일본에 가면 여학교도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일본인 담임선생은 일본에 갈 것을 부추겼습니다. 그의 나이 14살. 어머니는 일찍 여읜 상태였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징용을 가고 없던 상태입니다. 배고프던 시절, '여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나주 출신 24명을 포함해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 광주전남 5개 지역에서 일본 나고야로 동원된 사람만 140여 명. 불과 13~15살의 어린 소녀들이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 공업도시 중의 하나인 나고야. 그곳 미쯔비시 공장에서의 혹독한 환경과 고생은 더 언급하지 않으렵니다.
어린 소녀들은 군용 정찰기를 생산하는 이 공장에서 주린 배를 틀어잡고 하루 8시간~10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중 6명은 지진으로 현지에서 목숨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이들에겐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집 딸은 일본 갔다 왔다더라."졸지에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오가던 혼담도 번번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어렵게 가정을 꾸렸지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몇 놈이나 상대했느냐?"그때부터 남편의 부정(不貞)과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밖에서 데리고 온 여자와 한 방 생활을 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너는 몸 팔고 왔는데, 내가 바람피웠다고 해서 뭔 죄냐?" 견디다 못하고 파혼을 당하는 등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혼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투쟁... 끝내 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