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문내 하구병문내가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무근성 서쪽 동한두기 마을에 있다. 병문내의 서쪽에 용연이 있다. 작가가 어릴 적에 파도타기를 하며 놀았던 바다가 이곳이다.
장태욱
작가에게 '가족'이란 삶을 든든히 후원할 만한 공간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집 밖을 나돌았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친정 생활을 했다.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던 작가는 친가와 외가를 오가며 유년을 보냈다.
끝없이 방황하던 아버지는 4·3이 일어난 후에는 이념 대립의 광풍을 피해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헌병으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군복을 벗고 인천 부둣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결국 사업에 실패했고, 다른 여자를 얻어서 새 살림을 차렸다.
그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4·3의 참화 속에서 사그리 불타고 주춧돌과 돌담만 남은 폐허에서 삶을 일구는 신석기시대 농경인" 같았지만, 자존심은 몹시 강했다. 남편의 외도에 몹시 분통해 했고, 그 분노의 화살은 어린 아들을 향했다.
아버지는 인천에서의 살림이 거덜난 뒤 돌아왔다. 7년 만에 아버지와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한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아들이 해주는 발마사지가 아버지에게 수면제 효과를 발휘했다. 작가는 당시 자신이 만진 것은 아버지의 발이 아니라 아버지의 슬픔이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는 얼마 후 군청 임시직 서기로 직장을 얻었다. 가족들이 모두 기뻐했으나,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는 한달 만에 직장을 떠났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돼지치기였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영영 실패자의 모습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