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몇 번의 실패를 겪었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빚을 내어 시장에 있는 속옷가게를 하나 얻었다. 그러나 IMF가 터지면서 재래시장에는 손님이 말랐다. 사진은 대구광역시 서문시장의 한 속옷가게.
문경미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몇 번의 실패를 겪었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빚을 내어 시장에 있는 속옷가게를 하나 얻었다. 제법 목이 좋아서 명절대목이면 동생까지 나서서 이른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양말 선물세트를 신나게 팔아댔다. 하루에 네댓 박스씩 선물세트를 포장해서 손가락이 아팠지만, 이번 가게는 잘 되나 보다 싶어서 힘들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IMF 구제금융 위기가 터졌다. 재래시장에는 손님이 말라갔다. 가게에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고, 물품 결제 대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보증도, 담보 세울 집도 없는 어머니보다는 갓 대학에 들어간 내가 대출을 내는 것이 쉬웠다. 은행에서는 딱 등록금만큼만 대출해 주었지만 당시 삼성이나 LG같은 캐피탈들은 학기당 500만원씩, 더구나 중복해서 학자금 대출을 해주었다.
학자금 대출이 아니더라도 협동조합이나 상호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뿐더러, 어머니는 내가 교대를 졸업할 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라고 하셨다. 나도 그렇게 믿었고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채 대출서류들에 도장을 찍어댔다.
그렇게 3년을 버텼다. 이자에 이자가 붙었고 거기에 연체이자가 붙었다. 가게에 있던 어머니의 달력은 칸칸이 갚을 돈이 적혀있었다. 피하는 전화가 많아지는 만큼 어머니의 눈물과 초조함도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도가 났다. 살던 집의 전세금은 바로 압류가 들어왔다. 가게를 빼면서 받을 권리금으로 방 한 칸이라도 얻으려고 했지만, 정신없는 통에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거리에 나앉았다. 친척도 친구도 등을 돌렸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상 인심이 그랬다.
당장 내일 식비도 없는 집에 들이닥친 채권자들은 교대 졸업반이던 내게 지불보증을 요구했다. 오전 8시부터 밤 12시까지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에 400만원이 넘게 벌었지만, 매번 들어오는 동산압류(집에 있는 가구집기에 대한 압류)에 이자를 되는대로 해결하다 보면 생활비로 남는 돈이 없었다. 전기가 끊기고 가스가 끊기기도 일쑤였다. 이사를 하고 숨어살기 시작했다.
종일 일해서 이자 메우던 대학생, 그렇게 꿈꾸던 교사 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