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기다림>
SBS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처럼 정순왕후에게 정인이 있었고, 그를 만나러 궁 밖으로 나간다는 설정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드라마의 재미와 극적 전개를 위한 설정일 뿐이다. 그러나, 송낙을 들고서 소녀 같은 눈망울로, 그리움을 가득 담은 채 서 있는 정순왕후의 모습은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웠고, 과거의 신윤복도 그런 모습으로 서 있던 어떤 여인을 그렸을 것이다.
비록 드라마적 설정이지만 이런 이야기와 함께 그림을 보니, 뒤편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에 그리움이 함박 담겨 있다는 말도 수긍이 가고, 보면 볼수록 애잔하게 가슴에 남는다. 게시판에 이 그림이 좋다는 의견이 많은 걸 보니, 그들도 또 한 편의 그림을 알고, 보고,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주인공과 그림이라는 씨줄, 허구라는 날줄신윤복은 고령 신씨이며, 화원인 신한평의 아들이다. 태어난 해는 아버지의 나이와 활동을 고려해 1750년∼176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는데(1758년에 태어났다고 적은 간송미술관 도록도 있다) 죽은 해도 언제인지 미상이다. 8대조가 서얼(庶孼)이어서 중인 가문이 되었고, 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가 고령 신씨 족보를 통해 파악되었을 뿐, 부인과 자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림은 남아 있으나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이렇게 베일에 싸인 신비의 화가이기 때문에 그가 혹시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 소설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는 '단오풍정(端午風情)'을 신윤복의 화원 취재 출제작으로 설정했고, 정조의 밀명으로 김홍도와 동제각화(同題各畵-같은 주제로 서로 다른 그림 그리기)를 하며 현재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실려있는 그림들을 그린다고 설정했다. 이 설정들은 현실적으로 보아 모두 사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림과 주인공이라는 원재료에 그림을 그리게 된 상황이라는 허구를 절묘하게 잘 버무려 놓았다.
드라마 및 원작 소설은 신윤복과 김홍도가 같은 주제임에도 서로 다른 분위기로 그린 그림이 여럿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동제각화 에피소드를 만든 것 같다. 신윤복의 '주사거배'와 김홍도의 '주막도'를 이렇게 서로 연결시켰고,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조가 이를 자신의 통치에 활용한다는 상상력까지 더했다.
'빨래터'를 그리게 되는 상황은 더욱 절묘하다. 드라마는 그림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노론 세력(신윤복의 '주사거배'에 낮부터 양반에게 술대접을 받는 관리들의 모습이 표현돼 있기 때문)이 도화서 화원들을 허드렛일로 내몰고, 김홍도와 신윤복에게 가장 힘든 빨래 업무를 맡겼다고 설정했다. 그래서 그들이 빨래터에 가야 했기에 '빨래터'라는 그림을 그려서 왕께 올렸다는 그럴싸한 한 편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이제는 여인들의 빨래터를 웬 엉큼한 남정네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훔쳐보는 그림도, 활을 든 해사하게 생긴 남정네가 빨래터 한 가운데 떡 버티고 서 있는 그림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빨래터 여인들에게 돌 맞는 상상을 하며 그린 그림이라는 이야기가 생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