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열화당 출판사 사진책 겉그림, 오른쪽은 1985년에 나온 잡지 <샘이깊은 물> 겉그림. 사진작품에서 어느 대목을 살려야 하는가를 바라보는 눈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는' 사진이며, 우리한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진입니다.
최종규
눈에 익은 몇 가지 사진은 <샘이깊은 물>이라는 잡지 1980년대치에 실려 있기도 한데, 그때에는 '사진에 담긴 사람들 얼굴'을 환히 알아볼 수 있게끔 사진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참에 나온 강운구 님 사진책에는 사람들 얼굴이 시커멓게 죽고 만다. '깜둥이'가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얼굴에 어두움이 드리운 듯한 느낌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눈을 맞는 어머니와 등에 안은 아기 사진을 보면, 아기는 샐쭉하거나 뾰루퉁한 느낌인데, 잡지 <샘이깊은 물>에서는 그저 맑은 느낌일 뿐이다.
아기를 안은 어머니 얼굴 느낌도 사뭇 다르다. 다만, 이 사진은 눈이 내리던 날이고 들판도 눈으로 하얗게 덮였기에, 잡지 <샘이깊은 물> 사진은 뒤쪽이 온통 허옇다. 열화당 출판사 사진에서는 뒤 들판이 거뭇거뭇 나오도록 해서 풀로 이은 헛간도 잘 보이기는 한데, 이 사진에서는 아기를 안은 어머니와 아기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사진에서도 한복판에 아기 어머니와 아기가 들어선다.
뒷모습(배경)이 중요하다면 얼마든지 옆으로 돌려서도 찍을 수 있었겠지. 다른 데를 보지 말고 한복판 어머니와 아기를 보라는 사진이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기 얼굴이, 또 아기를 안은 어머니 팔뚝과 포대기가 저렇게 시커멓게 죽도록 사진을 다루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이 사진은 겉그림을 수놓는 '가장 돋보이도록 내세운 작품'임에랴.
가만히 보면, 열화당 출판사 사진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운 느낌이다. 지난날 <샘이깊은 물>에서 만나던 강운구 님 사진 느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할까. 어쩌면,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는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달라지거나 사라지기도 한 안타깝거나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뜻이 있었기에, 부러 이처럼 사진을 다루었는지 모를 노릇이다.
그러면, 강운구 님이 처음 이 삼부작 마을을 찍을 때에도 '어두운 얼굴빛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사진으로 담았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바깥사람 드나들 일이 거의 없이 조용한 산골마을에서 살아가는 푸근한 사람들 냄새와 이야기를 사진 한 장에 담으려고 했던 강운구 님 사진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는 그동안 '푸근한 사람들 냄새'로 가슴에 담고 있던 느낌을 조각조각 부수어 버린 터라, 강운구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한 잘못으로 출판사에 '독자 피해 보상'이라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모처럼 나온 반가운 사진책이라서 기쁘게 장만했지만, 마음을 너무 무겁게 짓눌렀기에, 출판사 인터넷 누리집에 찾아가 항의하는 글을 올린다.
쓰겁게 웃으면서 생각한다. 사진을 보는 눈이 달라서 그러겠지, 아무렴. 책이름을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처럼 붙이는 마음이어서 그러겠지, 아무렴. 나는 '마을 삼부작'에 따옴표를 붙여서, 이 산골마을 사람들 삶과 이야기를 읽어내는 데에 눈길을 두지만, 출판사에서는 '강운구'에 따옴표를 붙이고 '30년 후'에 따옴표를 붙였으니 다르겠지.
스티글리츠 사진도, 앗제 사진도, 뒷사람들이 필름을 어떻게 다루어 사진으로 만드느냐에 따라서 느낌과 이야기가 사뭇 달라진다고 하지 않던가. 최민식 님이 찍은 '사람' 사진들도, 필름을 사진으로 만들 때 빛을 얼마만큼 쬐게 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한국 사진밭 높낮이가 퍽 낮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으랴 싶다. 이웃나라 일본이야 워낙 사진밭 높낮이가 높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사진밭 높낮이가 높든 낮든, 사진 질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고, 흑백 사진책에서는 빛느낌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가는, 사진 만지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밑바탕이 아닐까 싶지만, 모르겠다. 알 수 없다. 먹칠한 사진과 허옇게 날리는 사진도 좋다고 여긴다면, 아니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면, 나야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