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이두호 선생
이정환
다만 문제가 있었다. 주제는 '가장 한국적인 만화'에 꽂혔는데, 가장 잘 아는 소재는 '로마 저고리'에 머물러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선생의 <벤허>만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정을 무참하게 배신한 멧살라 앞에 집정관 양아들로 벤허가 컴백하는 장면의 짜릿짜릿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대로 읽은 선생 작품이 없기도 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허영만이나 이현세란 '이름'을 편식했고, <머털도사>(1985)가 뜰 때는 머리통이 너무 굵어버린 후였다. 다 아는 이야기 <임꺽정>(1991)도 굳이 만화로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민초'나 '한국적'이란 말에 그저 혹했을 뿐, '내 인생의 이두호 만화'는 <벤허>에서 꽉 막혀 있었던 셈이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이두호 인생의 영화'가 <벤허>란 것을 알면서부터.
선생은 <벤허>를 "그냥 아홉 번, 그림 때문에 다섯 번"이나 봤다고 소개했다. 도합 열네 번이나 보고 대사까지 외울 정도였다고 하니, 나중에 '단관'으로 구경한 영화보다 선생의 만화가 더 생생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던 셈이다. 선생은 2005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 <내 인생의 영화>에서 <벤허>를 이렇게 추억한다.
"나는 고등학교를 야간에 다녔다. 가끔 전기가 나가고 석유램프나 촛불로 공부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선생님께서 곧잘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평소에 별 말이 없었던 내가 이야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물론 <벤허> 이야기였다 …… 까만 교복의 여고생이었던 마누라와도 세 번이나 봤으니 영화장면은 물론 대사까지 줄줄 외울 정도가 되었다. 나중엔 류 웰리스가 쓴 소설 <벤허>까지 사봤다."
두 번째 이두호의 벤허 이야기 '가난 때문에 벤허를 팔다' 가난이 만들어낸 '벤허 이야기'도 있다. 오직 화가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 진학했지만 "하루 하루가 전쟁이었다"고 하는 서울 유학생 시절. 선생은 자서전 <무식하면 용감하다>(2006)를 통해 춥고 배고팠던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마음의 양식도 좋지만 몸의 양식이 더 절박했다. 쌀을 살 돈이 없어 굶던 끝에 책을 한 권씩 팔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내가 애지중지하던, 열 네 번이나 본 영화 <벤허>의 원작소설까지 팔아먹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닥쳐왔다."
제대 후 닥친 '또 다른 고비'는 더욱 높았다. 캔버스를 직접 만들고, 유화 물감이 없으면 페인트를 섞어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복학까지 하기는 어려운 사정이었다고 한다. 무얼 해서 먹고 살 것인가. 그 대답은 중학생 시절 자신의 이름으로 만화를 출간했던 경험을 되살리는 것뿐이었다.
본격적인 만화가 생활, 형편이 풀리기 시작했다. "회사 다니는 친구 월급보다 서너 배는 많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고양이 세수로 목이 늘 새까만 '까목이'를 등장시킨 <폭풍의 그라운드>나 야구하는 스님 '팔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바람처럼 번개처럼> 등 잇따라 히트작을 내면서 '이두호'란 이름은 스타 작가군에 당당히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