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 Automat>, < Hotelroom>, < New York movie>, < Sunday morning >
Edward Hoper
<자동 판매식 식당Automat>(1927)에서는 여자가 혼자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다. 늦은 시간이다. 여자의 모자와 외투로 보건대 밖은 춥다. 여자가 있는 실내 공간은 크고, 불이 환하고,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 여자는 사람을 꺼리는 듯하고 약간 겁을 내는 것 같다. 공공장소에 혼자 앉아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다. (…) 그녀를 보다 보면 어느새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 배신이나 상실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그녀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손을 떨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혼자일 수도 있다. 이 여자와 비슷하게 생각에 잠겨, 이 여자와 비슷하게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남자와 여자들. 이런 공동의 고립은 혼자인 사람이 혼자임으로 해서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유익한 효과가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설명을 따라 여기저기 찬찬히 눈을 훑으며 그림을 바라봅니다. 그녀의 옷차림, 그녀의 표정을 세세히 바라보고 이내 실내의 분위기와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순간, 제겐 이 그림이 단순한 평면을 넘어 입체적으로 다가오더군요. 순간, 조용히 퍼져나가는 마음 속 진동. <자동 판매식 식당>은 슬픔을 그린 그림이지만 그저 슬픈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씨는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에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낮은 목소리로 진중히 속삭이는 듯합니다. 토닥토닥, 괜찮다, 괜찮다고. 그림 속의 고독은 이 세상에서 나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님을, 그림 속의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외로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참으로 오묘하지 않은가요!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통해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을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이.
사실 저는 이러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품은 ‘신비한 비밀’을 아주 뒤늦게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미처 몰랐던 슬픔이 주는 위로의 힘에 적잖이 놀라며, 기뻤답니다. 어떠신가요? 당신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조심스레 고백하자면, 저에게도 은하수 속 한 무리가 되어 반짝이던 삶의 모습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샘솟던 시간은 아프게 흩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은하수의 그 수많던 별들이 우두두둑, 눈물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저는 깊이, 깊이 내려만 갔습니다. 그 하강이 저를 성찰과 익음으로 이끄는 것인지, 우울과 자괴로 이끄는 것인지 늘 헷갈렸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전 계속 잠겨만 있군요.
그렇게 잠겨버린 제 모습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았답니다. 어, 왜 이러지? 내가 이리 슬퍼해선 안되는데, 내가 우울할 수는 없는 일인데, 이렇게 마음의 황량함이 오래간다는 건 부끄러운 일인데, 안되는데, 나는 꼭 강한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실패자, 약자’라는 스스로의 호명이 두려웠고, 가라앉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질 못했답니다.
그렇게 ‘의지’란 이름으로 제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희망’이란 이름으로 제 자신을 절벽으로 몰아세웠네요. 네, 의지와 희망, 당연히 좋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제 자신을 껴안을 수 있는 의지와 희망이어야만 진실로 값질 수 있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의 ‘신비한 비밀’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멀리하고 싶었다는 게 진심에 가깝겠죠. 제 마음 속 저의 슬픔을 부정했듯, 그림 속에 담긴 슬픔도 부정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림 속의 ‘실패자, 약자’가 나인 듯해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덧 숙였던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미처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죽 흘렀고, 저도 조금은 자란걸까요?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 꼭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공지영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중에서)그래요. 저도 어느덧,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이 틀리 수도 있음을, 때론 제 자신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을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제 안의 슬픔과 고독은 그저 도려내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다 스스로가 품고가야만 하는 것임을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규정해둔 정답과 모범에 저를 괴롭게 구겨 넣는 것이 성공과 행복의 길은 아니겠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문득문득 품게 될 즈음, 비로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순간, 탁, 입체로 떠오르기 시작했답니다. 여전히 외로웠지만 부드러운, 심지어는 유쾌한 외로움이 다가왔고 이내 알 수 없는 고요함 속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나의 부드러운, 심지어는 유쾌한 외로움!
자, 그림 이야기, 길게 돌아왔는데요. 이제 음악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요. 이 편지를 통해서는 당신께 직접 음악을 들려드릴 수가 없지요. 그림은 편지지에 담아 넣을 수 있지만, 공기를 타고 뛰어노는 음악은 차마 편지지에 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림 이야기를 앞서서 꺼냈답니다. 호퍼의 그림을 통해 음악 이야기에 담고 싶은 그 느낌을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생생히 느껴보시길 바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