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판이 끊어진 김수정 님 만화 <쩔그렁 쩔그렁 요요>
최종규
아침에 기저귀 빨래를 마치고 옥상마당 빨랫줄에 널려고 하는데, 고추잠자리 한 마리 빨랫줄에 앉아 쉽니다. 빨래를 살포시 얹으면 괜찮으려나 싶지만 그만둡니다. 빨랫줄이 한들거리면 놀랄까 싶어서. 조금 뒤에 말리자 생각하며 마루에 이어 놓은 빨랫줄에 넙니다.
이십 분쯤 지나서 내다보는데, 잠자리는 아직 앉아 있습니다. 또 이십 분 뒤에 내다보아도 그대로. 이 녀석이 꽤 오래 쉬네. 기저귀를 햇볕에 말리고픈 꿈을 꺾어야 할까? 아주 살며시 널면 어떨까? 살금살금 나가서 빨랫줄을 잡습니다.
잠자리가 확 날더니 휙 떠납니다. 날아가는 잠자리를 멍하니 올려다봅니다. 그래도 우리 동네에는 마당이나 골목길 한켠에 줄을 드리워 빨래 너는 집이 많으니, 네가 쉬었다 갈 곳은 많겠지. 무쪼록 다른 데에서라도 느긋하게 쉬어 보렴.
한낮, 옆지기가 젖을 물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가 똥을 뿌지직뿌지직. 고놈 참 시원하게 누네. 기저귀 한 장 흥건히 적십니다. 더 눌까 싶어 잠깐 기다린 다음 똥기저귀를 걷습니다. 뒷간에서 똥기를 빼내고 물에 담가 목초액을 뿌립니다. 조금 뒤, 날이 더워 머리를 감을 때 함께 빱니다. 다 빤 똥기저귀도 옥상마당 빨랫줄에 넙니다. 아침에 널어 놓은 기저귀 빨래는 벌써 다 마릅니다.
꺼칠꺼칠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다음 만화책을 펼칩니다. 밤잠도 낮잠도 제대로 이루기 어려운 요즈음, 글로 된 책을 보기는 쉽지 않고, 그림으로 된 책은 그럭저럭 읽어냅니다. 집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 누구나 책 한 권 느긋하게 손에 쥐기 어려울 테지요. 새삼, 책읽기란 여느 사람들이 쉬 하기 어려운 일이 되겠구나 싶으면서,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에도 짬을 내고 틈을 쪼개어 마음밭을 일구어야 한 사람으로서 내 매무새를 추스를 수 있다고 느낍니다.
김수정 님이 1983년에 그린 《쩔그렁 쩔그렁 요요》를 넘깁니다. 이 만화가 처음 그려지던 때는 제가 국민학교 2학년 때이고, 《아기공룡 둘리》와 함께 무척 좋아하면서 눈물과 웃음을 함께 짜내었습니다. 문득 그 어린 날이 떠오릅니다.
“시끄럽다! 이 녀석아, 요요는 고철이 아냐!” “참 형님도, 아, 고철을 고철이라고 부르는데 누가 뭐래요, 더 자랑스럽지.” “입 안 다물래?” (1권 139쪽)홀로 늙던 아저씨는 온삶을 바친 꿈이었던 ‘딸아이’를 사람으로가 아닌 로봇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 아저씨한테는 로봇이 아닌 ‘사람 딸’일 뿐이고, 둘레에서 이 아이를 놓고 ‘돈으로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꿍꿍이’를 키우거나, ‘일부러 못살게 굴거나 괴롭히는 짓’을 일삼거나 해도, 끝까지 아이를 지키고 감싸고 돌봅니다.
로봇아이 ‘요요’는 거칠고 팍팍한 세상에서 늘 생채기를 받습니다만, 자기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들을 믿고 따르며 조금씩 따뜻하고 큰 아이로 커 갑니다. “요요의 몸속에는 찌그러진 깡통과 못 쓰는 고철만 가득 들어 있대요.(144쪽)” 같은 말을 들어도, “바보 로봇이라니까, 그래서 괜찮아. 또 던져 봐.(145쪽)” 같은 말을 들어도, 이웃이나 동무 어느 누구도 못살게 굴지 않습니다. 앙갚음도 없습니다. 홀로 눈물을 흘리다가는, 자기 눈물을 조용히 닦아 주는 너른 손길을 잡으며 시나브로 ‘너른 마음길’을 배웁니다.
ㄴ. 김수정 - 미스터 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