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선생의 셋째아들인 심재호씨. 그가 인터뷰 도중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듯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심규상
다음은 당진과 필경사를 오가며 심씨와 나눈 주요 인터뷰 요지.
-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언제이고 그동안 어떤 일을 했나?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가 심해져 신문사를 그만두고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50년 동안 꾸준히 해온 일은 아비지의 육필 원고 등 유품을 찾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1000여매의 육필원고 등 유품 수천여 점을 찾아 간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일간 뉴욕> 발행인, 한국의 이산가족 찾기 운동 사업 등 언론과 민간통일운동을 해왔다.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해 북한도 수십여 차례 방문했다. 이산가족 찾아 주는 사업으로 빚을 많이 져 빚을 갚기 위해 최근 6년 동안 미국 국제방송국에서 일하다 은퇴했다."
- 아버지인 심훈 선생의 유품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근대 문학 작가들의 경우 남긴 육필이 거의 없다. 아버님의 경우 1000매가 넘는 육필 원고를 남겼다. 세상에 알려진 대부분의 것이 다 내가 모아 정리한 후 제공한 것이다. 이 외에 장편소설 <상록수> <직녀성> <영원의 미소> 등 친필 원고, 단편 <황공의 최후> 친필 원고, 시집 <그날이 오면> 일제총독부 검열판, <상록수> 영화 각본, 영화소설 <탈춤> 영화 각본과 <먼동이 틀 때> 촬영 원본, 붓으로 쓴 <오오 조선의 남아여>, 각종 사진 등 수천여점이 있다. 일본 도쿄대와 미국 시카고대 등으로부터 아버님의 유고를 사겠다며 백지수표도 건네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고민이 없진 않았지만 팔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백지수표, 그래도 팔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심훈 문학관' 건립을 위해 애써 온 것으로 안다. 진전은 있나?"'상록수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있다. 당진에 있는 옛 친구들이 주도해 만든 것인데 몇 해 전에 상록수 문학관을 건립한다고 청사진과 설계도까지 실린 책자를 미국으로 보내 왔다. 도와주려고 한국으로 와서 확인해 보니 구상만 있지 실제 실행 계획은 없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어 속이 많이 상했었다.
다행히 이번에 만난 민종기 당진군수와 당진군 담당관이 '지금 있는 심훈기념관을 확대 정비하는 방식으로 아버님의 유품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문학관 건립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군정 책임자가 나서 공식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해 매우 행복하다. 나 또한 50년간 모은 아버님의 유품을 모두 기증하기로 했다. 단 무작정 기증하는 것이 아닌 아버님의 문학 연구와 전시공간 계획을 구체화한다는 조건으로 기증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