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이란 사실이 죄스러웠고 공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호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양지에서 너무 좋은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여기 와서 깨닫고 부끄러웠다. 악덕 인력소개업자와 사업주들에 의해 임금을 떼이고, 폭행을 당해도 불법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가난과 절망의 고통에 갇혀 사는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이란 사실이 죄스러웠고 공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 양식장에서 일하다 짐도 못 챙기고 도망 나온 밀항자 신분의 중국인, 퇴직금을 요구했다가 폭행당한 불법체류자, 한국 시댁의 차별과 무시에 못 견뎌 찾아온 재중동포 새댁.
중풍 들린 뒤에 버려진 병자들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과 한 끼니의 밥에도 눈물 나는 이들로 넘쳐나는 '중국동포의집' 쉼터, 그리고 닭장과 쪽방으로 뒤덮인 가리봉은 절망스럽다 못해 암울하다. 인간의 존엄은커녕 생존조차 힘겨운 이 거리를 쉽게 떠나지 않겠다고 그는 다짐한다.
그에겐 부채의식이 있다. 고용허가제 등 이주노동자 정책 입안자로서의 부채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로서의 부채이다. 민청학련 세대인 그는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제도권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바꾸리라 결심하고 행정고시를 선택했다. 가리봉 행은 우연찮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를 '아저씨' 또는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머리 희끗한 그에 대해 나름의 예의를 갖춰 붙인 호칭인 것이다. 더 이상 고관의 예우도 없고, 그런 예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낮은 자가 되겠다는 말은 쉽지만 막상 낮은 땅에 내려와서는 아니 올 곳에 온 것처럼 낮은 이들과 불협화음을 내기 쉬운데 막힘없이 잘 어울리고 소통한다.
물론 봉변당하는 일도 적지 않다. 퇴직금 정산을 요청했더니 임금체불 업체의 경리 왈 '당신이 뭔데 퇴직금을 내놓으라 말라 하느냐!', '당신은 한국사람 아니냐!' 등 막말도 들어야 했다.
가족, 인맥, 학맥은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내 편이 아닌 남은 용납하지 않는 몹쓸 패거리 의식. 하물며 피부색이 다른 가난한 이주노동자는 오죽하랴! 차별의 현장에서 절절한 목소리를 듣게 된 그는 "이방인을 유독 차별하는 한국인의 '인격적 이중구조'와 관용과 포용력 부재의 한국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국제화,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 나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겉치레에 치중한 다문화, 위선적 이중구조를 극복할 다문화 정책과 상생과 소통의 문화가 절실하다고 진단한다.
노사 간의 다리를 놓았던 그가 가리봉에서 또 다시 다리를 놓고 있다. 지인들에게 자원봉사를 권한 결과 조우현 숭실대 교수와 법무법인 태평양 등이 자원봉사 대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입법과 현장의 간극을 확인한 그는 제도 개선에 대한 방안을 후배 관료들에게 전하면서 현장과 행정을 잇는 다리를 놓고 있다. 전관예우를 누리고자 함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행정을 통해 국가신뢰도와 인도주의의 위상을 높이도록 기여하는 길이 공직자로서 누린 빚을 탕감 받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공직자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