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사굴 출입구출입구가 굳게 잠겨있다.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2011년까지 통제하고 있었다.
장태욱
죽은자 전설로 화려하게 부활하다"서련의 시신은 충남 홍성군 보개산 덕은에 안장되었다. 그의 운구가 제주를 떠날 때, 김녕주민들은 모두 몰려와 통곡하며 애도했다고 전한다." 김녕사굴 입구에는 지금도 판관 서련의 은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 2기가 있다. 하나는 1937년 강공칠이란 자가 세운 '판관서공련기념비(判官徐公憐紀念碑)'이고 다른 하나는 1972년에 건립위원회에서 만든 '제주판관서련공사적비(濟州判官徐憐公社蹟碑)'이다. '제주판관서련공사적비'에는 판관 서련의 덕행을 기념하는 내용이 비문에 세겨져 있다.
서련은 실제로 1513년 2월에 제주에 부임하여, 1515년 4월 관청에서 죽을 때까지 제주판관으로 재임했던 인물이다. 이 전설은 실존 인물이 가공되어 마을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과 역사의 경계를 굳이 구분하자면, 그가 제주판관으로 재임했고, 병을 얻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역사 밖의 것이다. 주민들은 역사 밖의 이야기를 두고 역사적 인물에게 공덕비를 세운 셈이다.
판관 서련의 전설과 관련하여, 김녕노인대학 김군천 학장은 독특한 해설을 내놓았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 이 굴에 불량한 도적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툭하면 마을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심지어는 억지로 마을 처녀들과 혼사를 치렀을 것이다. 판관이 이들의 행패를 괘씸히 여겨 병졸들을 거느리고 이 굴에서 싸움을 벌여 이들을 소탕했다. 도적 일당을 일망타진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아있던 도적 무리들이 서 판관에게 보복을 하니, 서 판관은 방심한 틈에 도적의 칼을 맞고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앓아 누었다가 끝내 죽게 되었다."김 학장은 당시 서판관의 용맹을 귀히 여겼던 주민들이 당시 상황을 비약해서 전하다보니 결국은 '악당'들을 뱀으로 묘사하게 되었다는 거다. 하지만 이영권은 저서 '제주역사기행'에서 이와는 다른 해석을 내 놓았다.
"서련은 당시 제주에서 중앙권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제주민중들과는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련이 뱀을 퇴치했다는 대목은 유교학자가 중앙권력을 대표해서 행하는 제주민들의 토착신앙에 대한 파괴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서 판관은 주민들을 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민들의 정신세계를 억압하는 일을 저지른 셈이다. 이로 인해 현실에서 패배를 경험한 제주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서 판관은 하늘의 보복을 받고 죽은 인물로 남게 되었다는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