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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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미국과 함께 한국전쟁 직전까지 4·3 항쟁 등에서 6~10만에 달하는 좌익과 양민을 죽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는 15~30만에 이르는 좌익인사와 양민을 처단했다.
6·25 직전인 1950년 6월 19일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평화통일추진 특사를 파견했다.(물론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고르바초프가 가져온 소련 문서에는 스탈린이 먼저 남측에 평화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김일성에게 조언한 기록이 있다.)
아무튼 이승만은 북에서 온 특사를 잡아다 온갖 고문을 다하여 불과 며칠 만에 전향 선언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일은 보수· 우익들이 보아도 온당할 수가 없다. 참고로 당시 보수 김성칠(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 남긴 일기 한 토막을 읽어 본다.
"이북의 소위 조국통일 호소에 대한 이남의 처사도 온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넘어온 사람은 곧 되돌려 보내고, 그 제안의 불합리함을 천하에 밝히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닐는지? 제안의 내용은 우물쭈물 비밀에 붙이고, 이른바 호소문을 가져온 사람을 잡아서 전향을 시키고 방송을 하고 하니, 아무리 억지의 제안을 가져왔대도, 사자(使者)의 형식으로 월경해 온 사람들을 잡아서 족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남이며, 그들이 대한민국에 넘어와 보고 감격한 나머지 이북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는 발표는 좀 지나치게 어수룩한 수작이고, 국민은 또 어떠한 고문(拷問)을 썼기에 일껏 결심하고 넘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쉽사리 변절하게 하였을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정작 이승만은 6·25가 터지자 즉각 대전으로 도망쳤다. 그는 서울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대국민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피란하지 말고 직장을 지키라고 말했다. 그래 놓고 나서 그는 또 부산과 거제도로 피신한다.
이승만 정부가 한강다리를 끊은 것은 6·25 발발 불과 72시간도 안 되어서였다. 민간인은 물론 수만의 국군이 한강 이북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은행 지하에 현찰을 그대로 두고 피란하면서도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인사들은 적출해서 사살했다. 반면에 화급한 경황 중에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까지 챙겨서 풀어주었다.
이승만은 끝까지 휴전을 반대했다. 그가 반공포로를 무단으로 석방한 것도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반도에 26개의 핵폭탄을 쓰자는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작권을 돌려주려는 미국에 그는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자인가이승만은 민주혁명인 4·19에 의해 축출되었으니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이 그를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처럼 여기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1947년 시인 서정주는 <우남 이승만전>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서정주가 쓴 이승만 전기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이승만이 읽어 본 다음에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1995년에야 한국출판협동조합에서 간행했다.)
"서정주라는 사람, 좋은 시인인가?""네. 보통 이상입니다.""그런 사람이 동양의 예의범절도 모르나?"이승만은 자기와 자기 아버지를 경칭으로 호칭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을 정도로 권위주의적이었다.
돈암장 시절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최기일(재미 경제학자)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화상>에 따르면 이승만 앞에서 대등하게 5분 이상 말한 한국인은 없었다고 한다. 상대가 말을 시작하면 이승만은 1~2분도 안 되어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자기 두 손을 상대방의 입에 갖다대고는 했다.
부인 프란체스카는 권위적인 데에다가 인색하기까지 했다. 돈암장 시절 그녀는 맘에 들지 않는 한국인에게는 나이와 직함을 가리지 않고 "이 방에서 나가요, 앞으로 오지 마세요" 소리를 남발했다. 최기일은 송필만이나 고희동 심지어는 안재홍 같은 신사들이 프란체스카에게 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34세 때 25세 연상인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원망의 대상이었다. 이를 테면 윤치영이나 임영신 같은 이도 "리 박사가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산다면 좋을 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아쉬워했다.